해방공간을 누구보다도 극적으로 살다 간 작가, 설정식
1988년 7월 7일 남북 관계에 대대적인 변화를 가져온 기념비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7·7선언’이라고 불리는 이 발표는 북한 및 공산권 국가들과의 관계 개선을 골자로 하고 있어 흔히 대북 포용 정책의 효시로 평가된다. 곧이어 월북 작가 120여 명의 해방 이전 문학 작품 출판을 허용하는 해금 조치가 이루어졌다. 그 덕분에 정지용과 김기림의 작품이 조명되고 재평가받았지만, 해금의 혜택에도 불구하고 대중의 인식에 자리하지 못한 월북 작가는 여전히 많다. 이 책에서 주목하고자 하는 설정식이 그 대표적인 예다.
1912년 함경남도 단천에서 태어난 설정식은 식민지기와 해방기를 누구보다도 극적으로 살다 간 지식인이었다. 17살의 나이에 광주학생운동 서울 시위에 가담했다가 퇴학당한 뒤, 그는 만주로 유학을 떠나 학업을 이어 나갔다. 그러나 만주사변의 빌미가 된 만보산 사건이 일어나면서 오래지 않아 일본을 거쳐 경성으로 돌아왔고, 이때의 중국 체류 경험을 토대로 희곡 「중국은 어데로」를 써서 등단하게 된다. 경성에 돌아온 뒤에도 학업의 끈을 놓지 않았던 설정식은 1937년 연희전문학교를 최우등으로 졸업하고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마운트유니언대학과 컬럼비아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한 그는 해방기에 셰익스피어 4대 비극 『햄릿』을 최초로 완역하고 미국 문단의 최근 경향을 소개하는 영문학자로 활약했다. 또한 당시 드물게 미국에서 공부한 엘리트답게 미군정청 여론국장과 과도입법의원 부비서장을 지내는 등 미군정청의 관료로 생활했다.
하지만 좌우익의 이념 대립 속에 설정식은 계속해서 이율배반적인 행보를 걸었다. 미군정청의 관직을 맡으면서도 조선공산당에 입당했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국민보도연맹에 가입했다가도 끝내는 한국전쟁 도중에 월북했다. 설정식이 휴전회담 때 북측 통역관으로 모습을 드러내자 남측 모두가 충격에 빠졌다. 하지만 설정식은 1953년 남로당 숙청 과정에서 임화 등과 함께 사형당하며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하게 된다. 해방기에 민족 문제를 치열하게 고민하며 지식인으로 활약했던 그의 문학은 그렇게 남북한 모두에서 잊히고 말았다.
미공개 자료를 중점적으로 수록한 설정식 문학선의 결정판
2010년대에 들어서 설정식에 대한 연구가 시작되고, 그의 작품을 모은 선집과 전집이 출간되었다. 하지만 시와 소설, 비평과 번역 등 다양한 글쓰기를 거듭했던 그였기에 소개되지 않은 문학 자료가 여전히 남아 있다. 새로운 문학선 『설정식 문학선: 해방의 문학, 청춘의 상상력』은 미공개 자료를 중점적으로 소개했다.
먼저 설정식 문학의 출발점인 등단 희곡 「중국은 어데로」와 작가 약력 및 당선평을 최초로 수록했다. 이와 더불어 그의 일상과 문학적 입장을 엿볼 수 있는 논평, 에세이, 대담 자료를 실었으며, 해방기 잡지 『민성』에 수록된 단편소설 「오한」과 「척사제조업자」를 소개했다. 또한 1946년 『한성일보』에 연재된 장편소설 「청춘」과 1949년에 발간된 단행본 『청춘』을 비교 검토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했고, 1948년 『민주일보』에 연재된 미완성 장편소설 「한류·난류」를 수록해 해방기 마지막 소설 쓰기를 조명했다.
‘해방의 문학, 청춘의 상상력’이라는 부제는 해방 이후 탈식민, 반자본주의, 국제 연대를 향한 그의 비전을 담은 문학의 핵심적인 특징을 고려해 붙여졌다. 엮은이의 해설을 통해 독자들은 설정식이 문학을 통해 추구했던 치열한 고민과 시대 인식을 깊이 이해할 수 있다. 한 작가의 작품 세계를 이해하는 것을 넘어, 격동의 시대에 문학이 어떻게 현실과 상호작용하며 시대의 진실을 담아냈는지 바라볼 수 있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