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인가를 정리해야 한다는 것은
마음 한 곳을 오려내는 일과 같았다
명절연휴를 앞두고
형제들과 엄마의 유품을 들어냈다
옷이며, 그릇이며, 서랍 속에,
〈선생님, 건강하게 학교에 오시면
영자의 마음에도 꽃이 피는군요〉
주간보호센터의 선생님께 쓴 편지까지
구겨버려야 했다
엄마는 마음의 빈자리에
꽃을 피게 하는 방법은,
나보는 너를 생각하라고 적어놓으신 것 같다
대니산에서 내려오고 있는
노을의 그림자를 새겨보면서
비워내야 하는 것과
채워야 하는 것은 무엇인지
나는,
애써 답을 찾고 싶은 것이었다
-「노을의 그림자를 새겨보다」 전문
이 시는 ‘정리하다’, ‘오려내다’, ‘들어내다’, ‘구겨버리다’, ‘비워내다’란 서술어들이 환기하는 부재와 상실의 정서가 ‘새기다’, ‘채우다’, ‘적어놓다’, ‘찾다’란 서술어들에 내재된 주체들의 의지적 태도와 대응하며 시상이 전개된다. 시인은 먼저 어머니 생전의 행동과 그 흔적을 더듬으며 당신의 마음과 뜻을 유추하고 기리는 데 집중한다. “주간보호센터의 선생님께 쓴 편지까지/구겨버려야 했다”란 고백은 따스하고 순수했던 어머니의 마음마저 지워야만 하는 삶의 비정함을 드러내지만, 이어지는 확장적 의미는 어머니가 남긴 물리적 “빈자리”를 그의 삶에서 촉발된 공감과 이해의 지평으로 ‘꽃 피게’ 만들려는 노력이다. 다시 말해 “영자의 마음에도 꽃이 피는군요”라는 고인의 편지는 “나보는 너를 생각하라고 적어놓으신 것 같다”라는 화자의 깨달음을 얻는 소재로 연결된다. 여기서 ‘영자’는 어머니의 이름이겠으나, ‘나’와 ‘너’가 누구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시인은 이 부분을 중의성으로 남겨두는데, 이는 화자 개인의 서사를 ‘나’와 ‘너’에 해당하는 인간 일반에 상호 대응하는 보편타당한 마음의 지평으로 확장하려는 의도로 여겨진다.
“대니산에서 내려오고 있는/노을의 그림자”를 “새겨보”는 일이란 인간의 근원적 한계에 대한 성찰을 가리킨다. 어머니의 유품을 정리하며 느끼는 상실감과 함께, 삶에서 무엇을 비우고 무엇을 채워야 할지에 대한 깊은 상념을 담고 있는 이 시는, 삶의 공허함을 극복하는 방법이 결국 타인과의 관계에 있다는 “답”을 더듬어 찾게 만든다. 한 존재의 ‘빈자리’는 그의 삶의 방식을 살아 있는 자들에게 가르치는 ‘redemption’, 즉 구원의 ‘자리’이기도 한 것이다.
아버지와 밭둑에 잠시 앉아
소쩍새 울음을 듣는 한낮
잘 들어봐, 소쩍쿵 하고 운다
아니다, 서어쩍 서어쩍 하고 운다
누구 말이 맞는지는 모른다
제비꽃이 피고
쑥이 돋아나는,
밭둑까지 와서 울어라
-「봄이면」 전문
소쩍새와 제비꽃과 쑥이 전부인 풍경 속에 아버지와 딸이 밭둑에 앉아 있다. 「봄이면」이 그려내는 풍경에는 세련된 언어 구사와 편재된 비유가 없다. 단조로운 풍경은 낱낱의 시어들을 엮는 시의 장치들을 최소한으로 줄이면서 명확하게 감지할 수 없는 정서적 파문을 최대화한다. 행간 속의 여백이 가지는 힘이다. “소쩍쿵”과 “서어쩍 서어쩍” 중 “누구 말이 맞는지는 모른다”는 말에서 어차피 마음대로 흘러가지 않는 삶이라는 페이소스가 느껴진다. 한편으로는 이것과 저것의 구분이 무의미하다는 불이(不二)의 사상 또한 읽히는 구절이다. 이는 “아버지와 밭둑에 잠시 앉아” 있는 일상의 평범함을 관통하는, 인간 조건을 초월한 보다 근원적인 것에 대한 화자의 인식에서 비롯한다. 이러한 설명이 정이랑 시에서의 자연이 자족적이고 충만하다는 뜻은 아니다. 시인이 주목하는 자연 사물들은 사실성이 휘발된 미학적 대상이라기에는 오히려 현실의 결핍과 괴리감을 간직한 존재들에 가깝다.
공원의 계단에서 마주쳤다
이 도시에서 어떻게 살아남아
떡하니 대가릴 쳐들고 있는지
동네아이들에게 돌팔매질당하지 않고
땅바닥을 밀고 밀면서 왔을 길,
먼저 떠나가길 기다렸으나
얼어붙은 나처럼 움직이지 않는다
뱀아, 뱀아, 뱀아
사람들에게 들키지 말고 가거라
어느 혼령을 실어 이승에 온 것인지
어찌 알 수 있겠느냐만
나를 보는 너는 필시
알고 있다는 눈빛이다
가거라, 어서 가거라
너는 너의 길을 가고
나는 나의 길을 가자
뱀아, 뱀아, 뱀아
-「뱀아」 전문
근원적 실재에 대한 인식은 도심의 공원에 출현한 뱀을 보고 “너는 너의 길을 가고/ 나는 나의 길을 가자”라는 무심과 배려가 반반인 태도에서도 드러난다. 이질적 존재의 출현 앞에서 몸이 “얼어붙”는 본능적 반응과 “사람들에게 들키지 말고 가”라는 기원의 이중성은 나와 다른 타자를 배척하거나 부정하지 않으려는 의지로 수렴된다. 이러한 양가성에는 단순한 연민을 넘어서는, 대상에 대한 이타성이 잠복해 있다. 화자는 “땅바닥을 밀고 밀면서 왔을” 뱀의 “길”을 헤아리며 “뱀아, 뱀아, 뱀아”라고 안타깝게 부른다. 너의 길을 가라면서도 반복해서 부르는 역설은 인간 중심의 도시 문명 속에서 이질적이고 혐오스러운 존재로 살아갈 대상을 동정하는 탄식이다.
대상과 현실에 대한 연민의 시선은 자칫 수동적 관조의 성격으로 인해 시적 자아를 우울한 정서 속에 함몰시켜버릴 위험이 있다. 하지만 시인은 사랑하는 이들을 상실한 내면의 고통과 슬픔을 안으로 감싸 안으면서 동시에 그 정서적 우울을 뚫고 나아가려는 의지를 명료하게 드러낸다. 그의 시는 ‘둥긂’으로 표상되는 조화롭고 평화로운 삶을 추구함으로써 독자의 공감을 얻는 데 성공하고 있다. “산은 산새를 품고 들판은 산을 이고,” 가듯 “나는 풀잎처럼 낮은 마음으로/ 저들과 이웃해서 살아가”는 게 “남은 숙제”(「남은 숙제」)라거나, “곁에 있는 사람에게도/ 낯선 그 누군가에게도/ 모나지 않게 살아가자”(「밭둑의 호박같이」)라고 시인은 다짐한다. “하늘 한 번 올려다보기 힘든” 우리의 하루에, “떠밀려 살아가는” 우리의 시간에 “둥글게 자란 모과향” 진한 시를 “보내드리겠다”(「모과향을 보내드립니다」) 약속하는 것이다.
『핥는다는 것』에는 죽음 앞에서 애처로워지는 “사람의 마음”(「발톱을 뽑고 나서」)이 넘쳐난다. 죽음을 앞둔 이가 “옮겨 가야 하는 곳이 무섭지는 않을까”(「엄마는 내게 다만 등을 긁어달라고 말했을 뿐이다」)를 조바심하고, “마지막을 정리하”는 은행나무의 “안간힘”(「안간힘」)을 측은해한다. “스텐 그릇에 도시락을 싸와 상가 모퉁이에서 숫돌로 가위를 갈아주던 할아버지”가 한동안 보이지 않는다. 사람들은 “북망산 갈 나이는 족히 넘었”던 노인이 “누구나 가야 하는 곳”에 갔을 뿐이라 “입을 모으”(「가위를 갈던 할아버지의 행방이 묘연하다」)지만, 모든 죽어가는 자들을 향한 슬픔은 시인의 삶과 끈끈하게 결합한다.
『핥는다는 것』은 기억이 애도의 곡진한 방식임을 알게 한다. 시인은 죽음이 편재한 부정적 현실로부터 추인된 위로의 언어를 통해 끝끝내 삶을 긍정한다. 정이랑의 시는 죽음의 나라를 건너 삶의 등불을 켜주려 이곳에 당도한 이들의 “순한 살결”을 “살아 숨 쉬는”(「핥는다는 것」) 혀로 핥아주는 사랑이다. 살아 외롭고 슬픈 자들에게 주어진 ‘redemption’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