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설
동화작가 이정애
⟪감응하는 존재로서의 시인, 이영균⟫
- 제9시집에 부쳐-
제9 시집에는 약 120편의 시가 담겨 있다. 그중 일부는 사회적 아픔을 향해 있는가 하면, 다수는 일상의 세목들을 투명하게 응시하며 자신의 내면을, 그리고 타인과의 관계를 다층적으로 비춘다. 그는 말한다.
“누군가의 마음속에 한 줄기 희망의 노래가 되고 싶어서, 오래도록 꿈이 되고 싶어서, 빛이고 싶어서 시를 쓴다.”
이는 시인이 왜 시를 쓰는지를 가장 맑게 드러내는 고백이자, 이 시집 전체를 관통하는 시학의 선언이다.
이영균은 감응하는 존재로서의시인이다. 그는 세상을 해석하기보다, 세상의떨림에 귀 기울이고, 누군가의 마음에 말을 걸기보다, 먼저 그 마음이 말하기를 기다린다. 그래서 그의시는 조용하다. 그러나 그 침묵은 결코가볍지 않다.
그의 시 〈 마음의 거울 〉에서 시인은 “거울 속 나는 투명하다. 투명할 때 가장아름답다”고 말한다.
그러면서도 그는 고백한다. “나는 뒷면을 꾸미고 살 수밖에 없다.” 이 모순되고 진실한 고백은,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에 대한 섬세한 성찰이다. 세상을 아름답게 감응하고 싶은 마음과, 현실에 기대어 살아야 하는 존재의 이중성이 겹쳐지는 순간. 그는 그 틈에서 시를 써낸다.
〈 아름다운 관계 〉에서 시인은 또 이렇게 말한다.
“가까이 봐야 더 고운 것도 있다”고.
그문장 하나에 그의인간관, 시관, 세계관이 모두 들어 있다. 그는 사람을 족쇄가 아닌 고리로 이해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다. 함께 묶이되 얽매이지 않는, 함께 있음속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그런 관계의 온도를 시로 구현하고 싶어한다.
그는 어린아이 같은 순진무구함 속에서, 끈끈한 가족애 속에서, 이 세상에 여전히 떨림과 희망의 가능성을 본다. 그는 사람 사이의 관계를 감정의 결보다는 윤리적 태도로써, 거리와 접촉 사이의 미묘한 떨림으로써 바라보고느끼고 싶어한다.
그렇다고 이영균의 시는 단지 감응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그는 무너짐 이전에 묻고, 들리지 않는 진동에 먼저 귀 기울이며, 보이지 않는 균열을 먼저 감각하는 시인이다. 그의 시 곳곳에는 조용한 경고가 있고, 그 경고는 세상을 향한 비판이 아니라 깊이 있는 자성의 언어로 울린다.
그는알고 있다. 사람은 모두 소문 없는물결처럼 지나가는 존재이고, 시인은 그 물결 사이에서 저 너머를 응시하고, 아직오지 않은 징후를기록하는 사람임을.
이영균은 말의 선지자가 아니다. 대신 그는 무너짐을 예감하는 마음의 예언자이다. 그의 시는 고요하지만 멈추지 않고, 작지만 방향을 틀게 한다. 그렇기에 이 시집은 삶을 아름답게 감응하는 동시에, 삶을 바르게 살아내고자 하는 예언자적 윤리를 지닌한 시인의 기록이다. 특히 이번 시집에는 사회적 비극에 감응하는 시들도 포함되어 있다. 세월호 참사에 대한 시 두 편은그가 단지 ‘삶의풍경’만을 쓰는시인이 아님을 증명한다. 그는 공공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으며, 그것에 대해 말하기 위해 먼저 침묵하고, 귀 기울이고, 오래 머문다.
〈 이태원 참사〉에서 그는 말한다.
“좋은 음악을 들으려 했을 뿐인데/ 명예나 권력 따위를 탐해서도 아니고/ 부나미모를 탐해서도 아닌데...도무지 납득할 수가 없다/ 왜 이런 불가사의한 참사가...”
이 언어는 분노보다 먼저 비통함을 감각하고, 해석보다 먼저 질문을 남긴다.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슬픔의 명확한 정의가 아니라, 그날 이후의 삶에서 무엇을 기억해야 하는가에 대한 응시이다.
이 시집의 표지로 선택된 그림 또한 그러한 ‘감응의 언어’를 시각화한 작품이다. 발달장애 예술가 박소영이 이태원 참사 직후 그려낸 이 그림은 밝은 색 위에 겹겹이 덧입혀진 검은 동그라미들을 통해 슬픔과 기도의 이미지를 구축한다. 말하지 않고, 판단하지 않지만, 그림은 오히려 더 정확히 말할 수없는 슬픔의 얼굴을 드러낸다. 이영균의 시와 박소영의 그림은전혀 다른 방식으로, 그러나 같은 지점을 향한다. 공공의 비극을 애도하고, 말해지지 않은 존재들을 기억하려는 예술적 감응의 자리다.
이 시집은 그런 시인의 마음을 가장 투명하게, 그리고 가장 조용하게 보여주는 한 권의 거울이다. 그 거울을 읽는사람 역시, 자신의 마음이 얼마나 투명한지, 얼마나 조용히 떨리고 있는지를 돌아보게 될 것이다.
무엇보다이영균의 시는 모두가 예술가인 시대, 오히려 예술가의 종말을 고하는 이 시대에 끝까지 살아남는 예술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 앞에 서게 한다. 그의 시는 그 질문에묵묵히 답한다. 살아남는 예술이란, 감응하는 존재만이 가능한 것임을. 그 감응은 기술이나 개념, 재현의 문제를 넘어, 시간을 견디고, 관계를 품고, 섬세한 결기를 잃지 않으면서도 자연의 질서에 순응하고자 하는 마음의 태도에서 비롯된다.
이영균은칠순이 넘은 나이에 세상의 흐름보다 계절의 변이, 시간의 움직임, 봄, 여름, 가을, 겨울이라는 시간의 질서에 더욱 민감하게 귀 기울인다. 그리고 그 흐름을 거스르지 않고, 그 안에서조용히 스며드는 시를 쓴다.
그의 시에는 빗소리에 살아오는 그리움을 깊이 바라보는 마음이 있고, 누군가의 조용한 숨결을 기억하려는 지극히 인간적인 응시가 있다. 이 시대에 예술이 여전히 필요한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이처럼 감응하고 남아 있는 자 때문일 것이다.
그의시는 화려한 기교로 사람의 눈을 사로잡기보다, 세상 속 미세한떨림과 인간 존재의 허실을 붙잡아 진실을 마주하게 한다. 특히 최근 작품 〈깊은밤, 가을 밤에〉서 보여준 “밤이 깊어야 가을이지”라는 표현은 단순한 감상이 아니다. 이 문장은 시간의 깊이를 삶의 진실과 연결하려는 시인의 고유한 시학을응축하고 있다. 계절은 깊어감으로써 완성되고, 시 또한 깊은 사유와 감응을 통해 진실에 다가선다.
그러므로 이영균의 시는 단지 언어의 조형물이 아니라, 순리의 리듬 속에서 묵묵히 말 걸고, 응시하고, 감응해 나가는 관계의 예술이다. 칠십이 넘은 나이에도, 그는 생의 끝이아닌 또 다른 시작을 예감하는 시를쓰고 있다. 언어를 다듬기보다 삶을 감각하려는 자세, 누군가에게 ‘오래도록 꿈이 되고 싶다’는 그의 고백처럼, 시인은 여전히 ‘살아 있는 자’로서 독자의 마음을 두드린다. 이 지점이 바로 이영균의다음 시집이 기대되는 이유다. 그가 바라보는 가을밤의 어둠 속에서, 우리는 다음 계절의 빛이 서서히 다가오고 있음을, 그리고 그 빛이 여전히 사랑과 감응의 언어로 오롯이 태어날 것임을 믿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