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오와 반지성주의, 분노와 무기력이 엄습하고 있는 삶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도덕감정이 필요하다
왜 갑자기 ‘도덕감정’인가? 과거로의 회귀 정서가 물씬 풍기는, 진부하고 고리타분하며 구태의연하고 케케묵은 듯한 용어―도덕감정을 소환하려 하는가? 청소년들이 대학수학능력시험을 위해 영혼 없이 암기하는 ‘윤리와 사회’의 확장판을 논의하자는 것인가? 아니면 전체주의 정권에 순종하는 ‘얌전하고 착한’ 시민을 만들기 위해 예절 교육을 강조하자는 것인가? 권위주의 정권에 ‘충성’하기 위해 의무적으로 ‘도덕과 윤리’를 배워야만 했던 세대에게 도덕감정이란 신물 나는 개념일 수도 있다.
현시대의 변화를 어떤 식으로 규정하든 간에 과연 이 시대가 우리의 안녕과 행복을 보장하는 ‘바람직한’ 방향으로 가고 있는가? 역사는 과연 진보하고 있는가? 우리의 사유와 판단이 요구되는 일들은 삶의 현장 곳곳에 널려 있다. 인간사만이 아니다. 점점 심각해지고 있는 지구환경과 생태, 기후위기로 인해 우리는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재설정해야 할 시점에 이르렀다.
오늘날 전 세계는 물론 한국 사회에 대한 진단만 보더라도 시급히 도덕감정을 소환해야 할 이유는 차고 넘친다. 우리는 옳고 그름, 좋고 나쁨, 바람직함 등을 사유하고 판단해야 하는, 그리고 선택하고 실천해야 하는 수없이 많은 ‘사태’들에 직면해 있다. 우리는 항상 나의 사유 판단과 선택에 대해 성찰해야 하고, 타자와의 소통을 통해 적정선을 찾아야 한다.
도덕감정은 지각, 사유와 판단, 실천 의지의 감정이고, 타자에게 자신을 개방하며 세계를 상상하는 감정이다. 공적인 장에서 발현되는 타자성찰의 감정으로서, 타자와의 소통을 통해 ‘적정선’을 합의하는 감정이다. 타자의 타자는 바로 ‘나’라는 점에서 나에 대한 성찰이며 배려의 감정이기도 하다. 모든 감정이 대상에 대한 인지와 판단, 의지와 실천의 기능을 가지고 있지만 도덕감정은 바로 그러한 감정들을 판단하는, 즉 ‘판단의 판단’을 수행하는 감정으로서 매우 다양한 하부 감정들을 통솔하고 있다. 공감과 사변으로서의 상상력은 도덕감정의 전위대 역할을 하고, 깊은 내면의 양심과 책임의 목소리는 스스로를 판단하는 재판관으로 작용한다. 나아가 우정과 돌봄, 배려의 도덕감정은 신뢰와 연대를 구축하는 에너지이기도 하다. 그러나 도덕감정은 결코 유약하지 않다. 그것은 불의에 대한 복수의 정념과 강력한 혐오 그리고 때로는 분노와 폭력까지도 호출하는 감정이다. 도덕감정은 기존 질서에 순응하기를 요구하면서 이데올로기로 변질된 ‘도덕들’에 이의를 제기하는 감정이다.
우리는 온 지구를 강타한 ‘코로나19 사태’를 경험하면서 ‘살리는 생명’과 ‘죽게 내버려두는 생명’을 보았다. 아울러 인간의 눈에는 아예 보이지도 않는 ‘미천한 것’의 엄청난 힘을 보았다. 나의 욕망을 방해하고 저지하는 것, 나와의 교감을 통해 내 감각을 넓히고 삶의 반경을 넓히는 것, 도너 해러웨이(D. Haraway)가 말한 대로 온갖 ‘트러블(troble)’들과 함께 살 수밖에 없는 것이 오늘날 인류 사회의 운명이다. ‘차이들의 차이’라고 말하지 않는가? 아무리 미분(微分)해도 다가서지 않는 지점이 존재한다. ‘사회적인 것(the social)’이란 이들의 차이를 엮어주는 가치와 제도, 즉 신뢰와 연대의 마당을 마련하여 ‘함께(with)’ 사는 것이다. 도덕감정은 바로 그러한 ‘사회적인 것’을 추구하는 삶의 에너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