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연하지 않은 것들이 당연해질 때
“싸우지 않고 뭘 얻을 수는 없는 거야.”
『그치지 않는 비』로 언젠가는 한국어로 씌어진 『호밀밭의 파수꾼』의 저자가 될 수 있을 것(신형철 문학평론가), 오랜 수련 끝에 나온 것임에 틀림없는 문학적 기량(안도현 시인), 읽는 내내 멈칫거리고 끊임없이 무언가를 사유해야 하는(유영진 아동청소년문학평론가)이라는 평을 받으며 문학동네청소년문학상을 수상한 작가 오문세. 그가 두 번째로 펴낸 장편소설은 『싸우는 소년』이다. 출간과 동시에 ‘세대를 불문하고 울림을 주는 책’ ‘일상에 스며든 폭력을 잘 드러내 주는 책’ ‘두 번 정독한 책’ ‘결국은 나를 돌아보게 하는 책’이라는 독자 후기에 힘입어, 마침내 개정판으로 선보인다.
오문세 작가는 『싸우는 소년』 출간 10주년을 맞아 현재의 청소년 독자들과 더 가까이 호흡할 수 있도록 문장과 장면을 수정하고 매만졌다. 해당 장면의 의미를 더욱 선명하게 보여 주면서, 현재의 언어로 다듬는 과정을 통해 작품의 깊이를 더했다. 또한 새로운 일러스트를 표지화로 꾸며 작품의 의미를 살렸다. 어둠 속에서 작은 틈으로 세상을 내다보는 소년의 이미지는, 오랜 시간 웅크리고 있다가 세상에 맞서기 위해 한 걸음 내딛는 작품 속 주인공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당연하지 않은 것들이 당연한 세상, 그리고 당연하지 않았어야 할 것들이 당연하게 자리 잡아 온 세상. 끊어 내지 않으면 언제까지고 계속될 부당함 속에서 해야 할 싸움을 외면하지 않고 싸우기를, 달아나지 말고 자기가 있어야 할 자리를 찾기를, 그렇게 끊임없이 싸워 나가는 이들의 건투를 빌며 이야기는 시작되었다.
‘싸워.’ 이렇게 시작한다.
응급실에서 눈을 뜨던 순간 보았던 문구로
소년은 응급실에서 눈을 뜬다.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큰 사고를 당한 소년은 침대에 누워 한 사람을 떠올린다. 안승범의 샌드백이나 다름없었던 친구 서찬희의 별명은 ‘좆밥 새끼’였다. 소년이 서찬희를 위해 당당하게 나섰다면 달라졌을까. 소년이 그의 ‘친구’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귓속을 파고드는 누군가의 말. “전부 니 잘못이라는 거 알지.”
소년은 병원이라는 작은 세계에서 저마다의 이유로 싸우는 사람들을 만난다. 누군가를 때려 주기 위해 복싱을 시작한 산이 누나를 만났고, 입이 가벼워 보이지만 싸움 앞에서만은 진지한 트레이너 주 관장을 알았으며, 반쯤 정신을 놓은 듯하다가도 이따금 “착한 건 안 돼.” 하고 맥락 없는 말을 던지는 박 할아버지와 사람들의 숨은 특질을 간파해 의인화된 새로 묘사해 내는 도도새 아줌마를 알았다. 그리고 반장 양아영이 규칙적으로 병실에 찾아와 던져 주는 노트가 좋았다.
하지만 가슴 한편에 박힌 장면 하나는 줄기차게 악몽을 끌고 왔다. 떨치고 싶어도 차마 지울 수 없는 선명한 장면이다. 오랜 병원 생활을 끝내고 일상으로 돌아온 날, 소년은 주 관장의 명함을 쥐고 체육관으로 향한다. 수없이 상상만 해 온 그 싸움의 결말을 매듭짓기 위해, 머릿속에서 수없이 그려온 펀치를 직접 내지르기 위해.
주먹을 뻗어야 한다
나한테는 싸워야 할 이유가 있다
소년은 몸과 마음을 단련하며 싸움과 도피의 차이를 서서히 깨달아 간다. 소년은 생각한다. 서찬희를 절벽 끝으로 몰아세운 안승범을 때려눕히면 무언가 달라지는지, 이번에는 제대로 싸울 수 있을지, 싸워서 이길 수 있을지 소년은 무엇도 확신할 수 없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내가 있어야 할 자리를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소년은 주변 사람들과 점차 가까워지며 알게 되었다. 하루도 빠짐없이 체육관에 나와 경기 준비를 하는 산이 누나도, 소년의 글러브의 원래 주인인 ‘I’라는 이름의 누군가도, 그리고 반장 양아영도 자신을 괴롭히는 문제와 싸우고 있다는 것을. 포기하고 싶어질 때마다 소년은 마음을 다잡는다. 싸우는 걸 멈출 수는 없다고. 마침내 기회는 찾아왔다. 땡, 하고 라운드의 벨이 울리기도 전에. 소년은 안승범을 향해 그동안 혼자 수차례 되풀이했던 말을 내지른다. “나랑 싸우자. 이 좆밥 새끼야.”
이 말은 다시 소년에게로 날아와 그의 가슴에 날카로운 파편처럼 박힌다. 소년은 온 힘을 실은 자신의 펀치가 진짜로 향한 곳이 어쩌면 안승범이 아니라, 자기 자신일지도 모른다는 진실을 맞닥뜨린다. 단편적인 장면으로 조각나 있던 기억이 하나로 잇대어져 되살아난 그날의 풍경 속에서 소년은 자신의 이름을 한 자 한 자 되짚어 본다. 당연하지 않은 것을 당연하게 만든 건, 바로 소년 자신이었다. 소년의 싸움은 모두의 기억 속에서 그날을 바로잡기 위한 싸움이었고, 자신의 망각 속에서 제 이름 석 자를 되찾기 위한 싸움이었으며,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로 가야 하기에 치른 싸움이었다. 이 싸움의 결말이 어찌 될지 알 수 없어도 분명한 것은 소년이 “앞으로 걸어갈 거라는 사실이다.”
소년은 안다. 이길 확률이 없다는 것을. 그래도 다시 시작하기로 결심했기 때문에 소년은 싸웠다. 이겼냐고? 나는 소년이 이겼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지지 않았다. 지지 않았기 때문에 이겼다.
_윤성희(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