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건축계에서는 유명 해외 건축가 중심의 국제지명건축공모 방식이나, ‘브랜드화’된 건축가의 개성적 형상에 기대는 경향이 두드러지고 있다. 이는 민간 상업 건축뿐 아니라 사회기반 시설이어야 할 공공 건축의 사례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2023년 11월 개관 십 주년을 맞았던 서울 소격동에 위치한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이하 서울관)은 건축가가 공모전 제안에서부터 ‘셰이프리스(shapeless)’, 즉 무형(無形)의 개념을 강조하여 이러한 보여주기식 디자인 경향과는 대척점에 있는 사례이다. 건축 자체의 형상을 부각하는 것이 아니라 주변 맥락과 융화되는 공간 시스템에 중점을 두는 개념으로, 첫인상이 압도적이진 않아도 사람들이 매일 드나드는 카페나 도서관처럼 일상에 스며드는 미술관을 의도한 것이다. 이번에 출간된 『셰이프리스 미술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 건축 십 년 후의 기록』은 서울관을 설계한 건축가 민현준이 지난 십 년을 되돌아보며 건축 기록을 엮은 것으로, 개인의 건축 아카이빙 작업일 뿐 아니라 앞으로의 한국 공공 건축을 위한 제안이기도 하다. 여기에는 공모전 제안 당시부터 설계와 공사 과정, 개관 이후 운영 방식까지 건축가의 시선으로 담겨 있다.
불통의 공간에서 국가를 대표하는 미술관으로
서울관 부지는 조선시대에 종친 관련 사무를 관장하던 주요 관서인 종친부(宗親府)가 있었고, 경성의학전문학교 부속의원이 설치된 일제강점기부터 제삼공화국의 끝과 제오공화국의 시작까지 대한민국의 근현대사를 거쳐 온 중요한 장소이다. 특히 1971년부터 삼십여 년간 국군기무사령부(이하 기무사)가 자리했던 시절에는 시민들의 접근이 허용되지 않고 북촌의 수많은 보행 가로들이 가로막힌 권력의 땅이었다. 이처럼 여러 층위의 역사들이 공존하는 자리에 현대 미술관이 들어선 사례는 세계적으로도 흔치 않다.
서울관 프로젝트는 2009년 겨울부터 이듬해 여름까지 두 번의 공모전을 치르면서 시작되었다. 공모에서 요구된 것은 1986년 과천으로 이전(移轉) 개관하여 근대적인 벽면 전시 위주인 국립현대미술관 과천의 역할을 확장하고 그 한계를 개선하는 미술관이었다. 당시 한국의 경제 발전 수준이나 서울이라는 도시가 가진 위상에 비해 공공 미술관의 상황은 열악했기에, 저자는 이십일세기 서울의 중심지를 어떻게 해석하는가가 계획의 중요한 시작이라고 보았다. 결과적으로 자기참조적(self-referential)인 언어의 건축보다 서울이 가진 도시적 역사적 성격과 결합해 장소특정적인 아이덴티티를 만들어냈다.
크게 6장으로 구성된 책은 기본적으로 건축설계 과정과 비슷하지만, 모든 내용이 병렬적 관계를 이루도록 되어 있어 독자들이 각자 흥미로운 주제를 선택해 살펴봐도 무방하다. 책에는 건축물 사진과 공모전에 제출한 배치도, 해외 사례 등 시각자료 157점이 수록되어 있으며, 여기에는 설계 당시의 스케치, 샘플 모형 등 건축가의 아이디어 전개를 엿볼 수 있는 자료도 포함된다.
각 장의 제목은 새로운 미술관을 정의하는 용어이며, 부제목은 기존 미술관의 관습에서 벗어난 서울관의 지향점을 의미한다. 1장 「동시대 미술관: 박물관에서 미술관으로」에서는 서울관 프로젝트를 본격적으로 소개하기에 앞서 저자가 오래전부터 가져 온 현대 미술관에 대한 의문들과 경복궁과 북촌을 중심으로 한 서울관 주변의 도시적 맥락에 대해 다룬다. 이에 더해 미술관 건축의 시작으로 알려진 뒤랑(J. N. L. Durand)의 뮤지엄 유형에서부터, 미술관의 전형이라 불리는 사례들, 이십세기 후반 들어 전형에서 벗어난 런던 테이트모던이나 뉴욕 구겐하임미술관 등의 선례를 폭넓게 따라가면서 서울관이라는 결과물이 어떤 변화의 흐름 속에서 탄생했는지 그 본질을 이해할 수 있도록 했다.
형상 너머의 건축
2장 「셰이프리스 미술관: 형상에서 전략으로」에서는 공모전의 진행과 설계, 개관까지의 전체적인 과정을 짚어 보면서 ‘셰이프리스 미술관’이라는 개념이 어떻게 구현되었는지를 살핀다. 1차 공모전에서는 ‘옛 기무사 부지’의 활용이 핵심이었으나 공사 도중 출토된 종친부 유구(遺構)로 인해 2차 공모전에서는 서울관의 상징적 중심이 ‘종친부 터’로 옮겨졌다. 여기서 마당은 저자가 이 변화에 대처하고 설계안을 발전시킨 중요한 요소로 언급된다. 고도지구로 지정된 경복궁 주변의 12미터 높이 제한에 따라 서울관의 전시실을 대부분 지하에 배치해야 했으나, 종친부 관련 원칙상 가능한 한 지하를 개발하지 않아야 하는 등 복잡한 실타래를 풀어나간 여정 또한 주목할 만하다. 이렇듯 조선시대와 근현대 건축물, 그리고 미술관의 공존을 이루어내는 것이 중요한 과제였다. 이 과정에서 거쳐야만 했던 문화재 심의와 주변 이웃과의 합의 과정 등을 구체적으로 서술함으로써 다른 공공 건축 계획에서 선례로 참조할 수 있도록 했다.
이어지는 3장 「장소특정적 미술관: 탈맥락에서 재맥락으로」에서는 현재는 미술관의 주출입구가 된 옛 기무사 본관과 종친부, 이를 해석한 서울관 건축과의 관계를 논한다. 공용 홀이자 전시공간으로도 활용되는 ‘서울박스’와 과거 병원이었던 자리에서 중정으로 변화한 ‘전시박스(현재의 전시마당)’, 미술관마당, 종친부마당 등 서울관을 장소특정적으로 구성하는 중심 공간들을 살펴본다. 서울관 전면에 별도의 건물로 배치된 ‘교육동’은 전시를 관람하지 않는 시민들도 편히 이용할 수 있도록 동선과 조망을 고려한 개방적인 공간이다. 강의실과 작가의 작업실, 도서관 등으로 구성된 이곳은 교육공간의 비중이 증가하고 있는 해외의 주요 미술관처럼 미래 교육에 대한 높은 비전을 상징한다.
다만 모든 공간이 설계 의도대로 실현된 것은 아니며, 실현되었더라도 운영 중 폐쇄적인 구조로 바뀌기도 하여 건축가로서 아쉬운 심경 또한 조심스레 풀어놓는다. 한편 서울관에 사용된 주요 건축 재료를 보면 경복궁 옆 종친부 터에 ‘전통적이지 않은’ 건축물을 만들어야 했던 고민의 흔적이 엿보인다. 그중 백색에 가까운 고령토를 사용한 테라코타 타일은 어두웠던 터의 역사를 반전시키듯 따뜻하고 밝은 분위기를 지니며, 주변의 유적과 함께 세월을 품어 가기를 기대한 건축가의 소망이 담겨 있다.
동시대 미술을 위한 건축의 변화
4장 「열린 미술관: 보물창고에서 공원으로」는 미술 애호가뿐 아니라 일반 대중까지 끌어들이는 공간적 장치이자 동시대 미술을 위한 변화된 형식으로서의 ‘열린 미술관’을 소개한다. 상업화되고 세분화된 도시공간을 잇는 ‘공원’을 닮은 서울관에는 담장이 최소화되었으며, 사람들은 어느 방향에서든 자유롭게 대지로 들어오거나 이를 통해 지나갈 수 있다. 저자에 따르면, 활보하는 보행자의 존재와 좋은 도시는 긴밀한 관계를 맺으므로 가로막혔던 골목들을 연결시키는 것은 서울관의 해결 방안이었다. 그러한 맥락에서 지구단위계획 규정에 따른 공중보행로의 설치 의무는 가장 긍정적이었다.
5장부터는 서울관에 영향을 준 특정 사례에 심층적으로 접근하면서, 서울관을 중심으로 동시대 미술관 건축의 변화를 고찰한다. 연대기순으로 작품들을 벽에 걸어 배열했던 전통적인 미술관과 달리 이제는 작품 자체가 아니라 작가와 관람객이 직접적으로 관계를 맺으며, 관람객이 참여하는 작품은 전시환경과 나아가 미술관을 변화하게 만든다. 5장 「관람객 중심형 미술관: 이동에서 집중으로」는 이에 따른 전시실 단위공간에 대한 내용으로, 서울관의 주축이 되는 각각의 전시실들을 몇 가지 형식으로 구분한다. 회화를 위한 전통적인 화이트큐브형 전시실부터 설치미술을 위한 매직박스형 전시실, 영상과 음향이 포함된 다원 예술 전시에 적합한 블랙박스형 전시실이 그것이다. 서울관 설계에서 많은 영향을 받은 인물 중 하나는 작품과 관람객 간의 관계에 기초한 미술관 건축을 제안했던 레미 차우그(Rémy Zaugg)로, 그의 기본적인 개념을 설명하면서 서울관 외에 그를 참고한 사례들도 소개한다. 6장 「군도형 미술관: 선형에서 그물망으로」는 전시실이 아닌 공용공간들이 주인공이다. 공모전에서 서울관을 정의했던 개념 중 하나인 ‘군도(群島)’가 중요하게 다루어지는데, 군도란 무리를 이루면서도 독립적으로 흩어져 있는 섬들이다. 즉 전시실들을 무리 지은 섬으로 본다면 그밖의 공간들은 이들을 연결하는 바다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느슨한 배열에 따라 관람객이 참여할 여지가 생겨나며, 미술관 건축의 새로운 전형이 만들어진다. 수동적인 선형의 동선과 대비되는 네트워크형 동선이 적용되는 미술관에서는 전시의 독립성과 관람객의 자유가 보장된다. 하나의 전시실은 하나의 건물이 되고, 이를 연결하는 동선공간들은 골목길이 되어 미술관 내부에 작은 도시가 만들어지는 셈이다.
공간적 기술적 문제들이 해결된 다음에는 사람들의 움직임이나 자연광, 소리에 관한 세부적인 요소들이 디자인되었다. 서울관은 대부분의 전시실이 지하에 위치하기 때문에 지상의 자연광을 어떻게 지하로 끌어들이느냐가 중요한 설계 주제였다. 이를 위해 건축가는 일반 유리보다 녹색이 적어 맑고 투명한 느낌을 주는 저철분 유리를 택했다. 또한 ‘도시를 보는 창’이나 전시실 내 천장 시스템을 적용함으로써 조도를 보완하면서 다양한 빛 환경을 연출했다.
또 다른 십 년을 향하여
아트숍, 카페, 식당 같은 편의시설은 동시대 미술관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중요한 시설이다. 서울관에서는 특히 휴게공간(현재의 카페)이 위치적으로나 내부 기능적으로 가장 의미있는 자리에 있다. 이에 따라 열린 형태로, 내부적으로는 공간들의 연결 역할을 하도록 계획되었으나 점차 상업시설의 운영 방향에 따라 폐쇄적으로 변해 가고 있음은 안타까운 일이다. 그밖에도 사소하게 여겨질 수 있는 요소들이나 운영에서 활성화되고 있지 못한 공간들은 독자들과 관람객들의 새로운 시선과 관심을 요하고 있다.
도시와 건축공간의 기본은 움직이는 공간과 머무르는 공간의 조합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마당은 길의 확장으로, 골목길들이 모여 넓어지면 마당이 되고 더 커지면 광장이 된다. 이처럼 서울관은 다양한 위치와 형태의 공간들이 관람객들이 모이고 머무르는 동시에 흩어지는 결절점 역할을 하도록 계획되었다. 이러한 공간들이 세계 어느 미술관에서보다 대중 참여적으로 작동해 왔다. 느슨한 건축과 그 안의 역동적인 공간 시스템이 변화무쌍한 현대미술을 위한 인프라를 만들어 가고 있음은 분명하다.
십여 년이 지난 후에야 이 책을 낸 이유에 대해 저자는, 개관 당시에는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요인들이 많았으나 이제야 비로소 건축 자체로만 볼 수 있는 시점이 되었기 때문이라고 밝힌다. 작가들과의 긴밀한 소통 속에서 준비된 개관전은 물론이고 그 이후 지금까지 좋은 전시들이 개최되었고, 그동안 많은 시민들이 이용하며 공간에 대한 이해도도 높아졌다. 관람객들에게 서울관과 이에 관계된 이야기들이 전시만큼이나 감상과 영감의 대상이 되기를 바라며, 건축물에 대한 이해가 바탕이 된다면 방문했을 때의 감흥도 배가될 것이다. 그 연장선에서 건축인들에게는 동시대 미술관에 관한 최신의 각론(各論)으로, 공공 건축 사업 관계자 및 서울관의 관리자 등에게는 서울관과 같은 특수한 공공 건축물을 이해하는 안내서로, 구체적인 지침이 되어 줄 책이다. 불과 십여 년 전까지 폐쇄와 불통을 상징했던 터가 기나긴 논의와 합의의 여정을 거쳐 지금의 모습으로 변모한 것처럼, 앞으로도 새로운 예술과 다양한 사람들이 서울관을 채워 나가길 기대한다.
이 책에서 공간 명칭은 준공 시점을 기준으로 적되, 필요에 따라 계획안이나 현재의 명칭, 실현되지 못하거나 변경된 내용도 밝혔다. 책 끝 부록에는 프로젝트 개요와 상세 도면을 수록하여 전체적인 구조는 물론 여러 방향에서의 단면도 확인할 수 있도록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