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지 시기, 1950-60년대 황금기, 유신시대까지
매혹과 선전의 한국 대중영화 계보학
이 책은 한국의 대중영화와 영화 문화가 근대 대중과 어떤 영향을 주고받으며 형성되어왔는지 살펴보며, 20세기 초반부터 1970년대까지 ‘매혹’과 ‘선전성’이 강한 영화들을 중심으로 영화와 국가의 통치성 사이를 추적한다. ‘매혹’이 자본주의적 방식으로 관객들의 욕망을 충족시키거나 창출하는 것이었다면, ‘선전’은 이를 통해 국가가 전달하는 메시지였다. 영화는 대중을 유혹하면서도 ‘국민화’에 복무했다. 또한 인기 있는 대중문화라면 그 무엇이든 적극적으로 차용하여 영화의 일부로 만들었다. 연극, 악극, 무대, 쇼, 무용, 대중소설, 수필, 외국의 영화, 라디오 드라마 등 시대마다 떠오르는 매체들에서 주목받았던 많은 요소가 영화의 일부를 이루었다.
한국의 이러한 영화 문화는 식민 지배와 박정희 독재라는 폭압적인 체제 안에서 약 반세기를 지속했다. 관객을 매혹하던 다양한 것들은 국가 이데올로기를 넘어 자율적으로 성장하기 힘들었다. 태생적으로 가난했던 제3세계 국가이자 식민주의, 전쟁, 독재와 같은 정치체 아래에서 생산될 수밖에 없었던 조선/한국 영화의 조건은 이 ‘매혹’에 덧붙여진 선전과 정치적 메시지를 만나게 하는 강력한 배경이었다. 이 책은 이러한 한국의 역사와 영화의 역사가 겹치는 순간에 영화가 어떻게 대중과 조우하여 어떤 정치를 만들어냈는지 탐구한다.
매혹의 파편이자 정치적 선전도구로서의 영화
1919년부터 ‘조선 영화’가 제작되기 시작하며 자국 영화라고 부를 만한 것이 영화로 제작되기 시작했으나 식민지 상황에서 식민정치가 개입되지 않은 영화는 없었다. 그 최초부터 일제의 자본, 기술, 인력과의 긴밀한 관계 혹은 간섭 속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다.
해방 이후에도 남한 영화는 뉴스영화, 문화영화, 극영화의 형태로 분화·발전했지만, 한국전쟁으로 인한 물자 부족, 박정희 정권의 군사주의 독재를 거치면서 자본주의적이거나 자유주의적인 형태의 영화 제작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남한의 영화는 극영화라 할지라도 국가가 제시하는 ‘우수영화’의 기준을 맞추어 영화를 제작함으로써 자본을 조달할 필요성이 있었고, 국가가 정한 검열의 기준을 맞추고자 일정한 ‘교육과 계몽’의 사회적 역할을 수행했다.
이런 제작 조건 속에서 탄생한 많은 조선/한국 영화는 영화를 통해 매체적 ‘즐거움’을 소비하는 관객의 욕망을 충족시키면서도, 이와 함께 영화의 중간에 노골적 정치 메시지를 전달하는 구도를 오랫동안 지속해왔다. 지금은 영화 상영 전에 상품의 광고를 접하는 것에 익숙한 시대지만, 오랫동안 한국에서는 영화 상영의 앞뒤에 이어진 〈대한뉴스〉나 문화영화를 봐야 했다. 대중이 원하던 ‘매혹’의 끝에 ‘선전’이 자리하는 ‘산만한’ 관람 형태는 한국의 관객에게는 오랫동안 자연스러운 관람 형태였던 것이다.
물론 모든 한국 영화가 이런 선전적 형태를 띠고 있거나 순전한 매체적 ‘몰입’이 가능한 극영화가 부재했다는 뜻은 아니다. 특히 1950-60년대 황금기에 이르러서는 할리우드식 영화 제작이 영화 만들기의 모델로 여겨지면서 이와 같은 영화 관람의 ‘산만함’은 현격히 줄어든 순수하게 ‘재미와 감동’을 추구한 극영화, 혹은 예술성을 추구하는 영화들도 생산되었다. 그러나 비록 이런 영화라 할지라도 불안정한 형태의 비균질성이 드러난다는 점은 유의할 만하다.
요컨대 한국의 많은 대중영화는 일정한 시각적 관계망을 통해 관객에게 직접적으로 내비칠 수 있는 미학적·오락적 속성을 필요로 했다. 그리고 이러한 매혹을 수반하지 않고는 영화의 이데올로기의 전달 또한 불가능했다. 대중영화는 개별 작품이 가진 내러티브뿐만 아니라 영화 텍스트가 ‘산만하게’ 전시하는 매혹의 파편들을 통해 관객을 ‘집중’시켜 일정한 ‘주체성’을 형성하고자 했다.
영화의 정치, ‘국민 만들기’
국가가 호명하는 대상은 각 정치적 국면마다 달랐지만, 그 방식은 유사했다. 이 책은 통상 1945년을 기점으로 역사를 나누는 방법을 넘어 ‘트랜스-전쟁’의 관점을 채택하여 폭압적일 수밖에 없는 전쟁과 같은 삶을 살아냈던 식민지와 독재 아래 만들어진 영화들을 분석한다. 그 과정에서 일제하 식민지인을 ‘국민’으로 포용했던 문화적 방식이 해방 이후의 국민 만들기에 얼마나 큰 영향을 주었는지 살필 수 있다. 관객을 극장으로 이끌었던 다양한 매혹의 기제들은 때로는 일본의 ‘신민’으로, 때로는 반공적 ‘국민’으로 때로는 민주주의적 ‘시민’으로 국가의 정치 안에서 유동했음을 살펴볼 수 있다. 그러나 1970년대가 되면, 영화 매체의 쇠락과 함께 더이상 반세기를 지속했던 이와 같은 ‘비균질’의 문법은 관객에게 매혹으로 작동하지 않았음도 확인할 수 있다.
책의 내용
1장 영화의 ‘매혹’과 식민지의 선전영화
20세기 조선에 도착한 ‘영화’가 어떤 방식으로 조선의 관객을 매혹했는지 상호 미디어적 관점에서 살펴본다. 영화 제작의 역사가 시작되기 전 영화에 열광하던 ‘감상의 시기’는 조선인 관객들의 ‘취향’이 형성된 시기였다. 이 시기에 쌓인 영화 관람의 취향은 선전영화의 제작에도 반영되기 시작했다. 조선의 자본주의적 근대화를 위해 제작한 선전영화 〈근로의 끝에는 가난이 없다〉와 〈미몽〉은 이른바 선전영화가 ‘조선의 관객’을 매혹하기 위해 어떤 상호 미디어성을 구현했는지 예시한다. 이를 통해 식민지적 통치성이 어떻게 조선 사회에 작동했는지 분석한다. 또한 자본주의와 식민화가 전쟁을 통해 확산되던 1930년대에 가장 근대적이고 대중적인 공연인 악극단이 어떻게 자본주의적 방식으로 발전하며 영화와 상호적 관계를 맺었는지 살펴본다. 그러나 전쟁이 가속화된 1930년대 말에 이르러서는 악극 공연은 나치나 이탈리아와 ‘협력’적 공연 형식을 만들어내게 되고 이후에는 노골적인 선전에 동원된다. 악극단의 매혹적인 공연들이 녹아들어 간 ‘조선식 파시즘 영화’에는 조선인을 ‘제국의 신민’으로 호명하는 제국의 정치가 강력하게 작동되었지만, 이러한 미디어적 배치가 관객에게 얼마나 설득력을 갖추었는지는 의문으로 남는다.
2장 반공-엔터테인먼트의 탄생
해방 이후 냉전적 국제 구도 속에서 남한의 영화 제도와 문화가 어떻게 군국주의적이고 파시즘적 일제의 정치를 바탕으로 군사주의적 냉전 문화의 형성으로 이어지는지 살펴본다. 해방이 되자마자 영화계의 중심적 담론은 ‘국가’ 중심의 영화 제작으로 모였는데, 이는 파시즘적 영화 제작 체제하에서의 영화 제작 경험을 탈식민적으로 전유한 것이었다. 더 나아가 식민지하 일제의 제국주의적 선전을 주도했던 악극의 선명한 이데올로기적 메시지 전달과 이를 이용한 영화 제작은 반공영화에 전유되어, 대한민국의 반공적 국민화에 기여했다. 이승만의 하수인 역할을 자처했던 정치 깡패 임화수가 설립한 ‘한국연예주식회사’는 악극을 기반으로 하고 인기 있었던 코미디언의 코미디를 통한 ‘반공-엔터테인먼트’를 만들어냈다. 이러한 행보는 일제하 선전영화가 ‘신민화’에 복무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반공적 국민화라는 이데올로기에 영화가 복무했던 역사를 되풀이한 것이었다.
3장 악극, 할리우드를 만나다: 탈식민과 냉전 사이
한국전쟁 이후의 ‘오락’적 산업이 어떻게 ‘할리우드화’되며 냉전적 방식으로 전유되었는지를 살펴본다. 특히 과거의 식민지 악극 무대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했던 세대가 어떻게 새로운 ‘미국적’ 세대 혹은 문화로 교체되며 관객을 매혹했는지 살펴본다. 이 과정에서 ‘식민지적 과거 문화’를 떠올리게 하는 ‘신파’와 같은 영화들은 부인되고, ‘냉전’의 맥락에서 재활성화되기 쉬운 ‘밝고 즐거운’ 악극 공연들이 선택적으로 영화화되어 냉전 상황에 적합한 영화로 선택되었는지 밝힌다. 당대 최고의 스타였던 김시스터즈가 ‘어트랙션’으로 등장하는 〈청춘쌍곡선〉, 〈오부자〉 등의 영화는 이러한 변화를 예시하는 영화다. 이 영화들은 초기 영화가 드러내는 카메라의 “쇼맨십”을 과장되게 보여주며 관객을 영화관으로 이끌었다. 동시에 과거의 식민지적 악극의 아이콘을 냉전적 상황으로 차용, 변형함으로써 변화한 냉전적 지형도 안에서 풍요롭고 행복한 미국처럼 한국의 모습을 과장되게 그려냈다. 그러나 이러한 ‘할리우드화’된 영화들 또한 한국의 현실을 완전히 봉합할 수 없었으며, 전쟁과 가난이 휩쓸었던 한국의 모습이 돌출되어 나오기도 했다.
4장 규격화된 시각장과 ‘코드화된’ 민주주의
1960년에 이승만 독재정권을 무너뜨린 4·19는 한국 사회가 ‘민주주의적’ 사회로 변화하고자 하는 열망이 증폭되었던 사건이었다. 그러나 약 1년 후인 1961년 5·16을 기점으로 한국은 또다른 독재체제가 형성되었고, 민주화가 이루어진 1987년 이전까지 유지되었다. 이 장은 ‘짧은 1년간의 민주주의’의 시간으로 여겨지는 4·19 이후의 영화들의 시각장을 살펴본다. 4·19 시기 이루어진 절차적 민주주의의 진전, 그리고 영화 속에서 이상적인 근대 도시의 매혹적인 시각장은 한국의 ‘리얼리즘’을 드러낸 것이라고 여겨졌으며 ‘민주주의적인 것’들이 ‘발전된 한국상’으로 인식되는 감각을 생성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민주주의적 시민’에 대한 ‘환상적인’ 상상이 박정희 독재체제에까지 이어진다는 점은 아이러니하다. 이러한 표상은 박정희가 주창한 발전주의에 기반한 ‘한국적 민주주의’ 국가관과 배치되지 않으며, 박정희의 ‘한국적 민주주의’라는 이율배반적 개념을 받치는 중요한 지지대 역할을 했다. 이 장에서는 1960년대 초반 4·19 직후 생산된 서울을 배경으로 한 ‘중산층 가족’ 영화들을 중심으로 어떻게 민주주의가 시청각적으로 코드화되고, 발전되고 안정된 서울이라는 평균화 ·규범화된 시각장을 만들어냈는지 살핀다.
5장 전쟁의 ‘오락화’, 그 안의 젠더 정치
영화의 시각장을 통해 ‘적합한’ 국민에 대한 ‘선별’이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지는지 살펴본다. 아시아-태평양전쟁과 한국전쟁하에 활성화된 전시 문화는 ‘씩씩한 남성상’과 이를 보조하는 여성상을 만들어냄으로써 ‘국민화’의 성별성이 자연스러운 감각으로 생성되었다. 해방 이후의 영화에 등장하는 ‘성장하는’ 한국 남성의 이미지는 이제 식민지의 ‘어린이’에서 독립투사나 국가 영웅이라는 ‘남성 어른’으로 자라나는 흥미로운 과정을 보여준다. 또한 1950-60년대 훈련소 영화와 전쟁 영화에 나타나는 영화의 코드들은 일제하 군국주의적 상황에서 국가를 위해 자신을 희생한다는 자기희생적 파시즘 문화를 재활성화시키며 박정희 군사주의 정부의 군사주의적 국가관에 복무한다. 그러나 이러한 남성성은 1960년대 말 북한의 도발에도 쉽게 무너질 수밖에 없는 불안한 것이었다. 〈남정임 여군에 가다〉와 같은 B급 코미디 영화에는 ‘성 전도’된 형태로 여성과 남성을 재현하는데, 이 영화에서 여성은 국가의 주체로 부름을 받는 ‘주체’로 호명됨과 동시에 남성성은 무력화시키는 이중성을 보인다.
6장 망각의 영화들: ‘아시아-태평양전쟁’이라는 ‘흉터’ 지우기
‘민주주의 국민’이라는 새로운 국민에 대한 상상이 식민 과거를 지워내는 방식에 대해 탐구한다. 냉전하에 일본과 새로운 ‘우방’ 관계를 맺게 된 정치적 상황은, 대중영화를 통해 일본과의 과거를 정리하고 새로운 방식으로 한국민의 주체성을 구성하는 방식을 만들어냈다. 〈청춘극장〉, 〈현해탄은 알고 있다〉, 〈돌아온 사나이〉 같은 영화는 ‘아시아-태평양전쟁’에 얽힌 기억을 아련한 청춘의 노스탤지어로 그려낸다는 점에서 식민지에 대한 ‘청산’되지 않은 감정들이 드러난다. 그러나 종국에는 ‘아시아-태평양전쟁’의 기억은 ‘흉터’로 재현되며 완전히 잊히기를 강요받는다. 1960년대의 영화가 이러한 ‘대중 기억’을 만들어내는 것은, 일본에 협력했던 ‘중간적’ 위치에 살았던 주체들의 모호함을 삭제하고 오롯이 대한민국의 주체로 소환하기 위한 ‘정치적인 것’이었다.
7장 유신시대, ‘국책’이라는 ‘말더듬이’ 영화
1970년대는 유신과 긴급조치의 발동을 통해 법적 “예외상태”가 상례화된 시기였다. 이 시기는 텔레비전 보급을 통해 영화 관객이 줄어들었을 뿐만 아니라 1972년 박정희 정부의 유신 선포 이후 국가는 ‘국책영화’라는 이름으로 국민을 위한 선전영화를 만들기 시작했다. ‘국책영화’라는 이름으로 영화가 만들어지면서 ‘자유주의적 통치술’마저 그 자리를 상실한 시기였다. 이 장은 1970년대 한국의 국책영화들이 국가의 주변부적 인물들을 규율하여 ‘적합한 국민’을 만들어내고자 했던 역사를 살펴본다. 국가의 균등 발전에 대한 불만을 잠재우고자 시작된 ‘새마을운동’의 일환으로 만들어진 ‘새마을 영화’는 국가의 주변부적인 위치에 있던 여성, 어린이를 적극적으로 국가 안으로 호출하여 마을을 이끄는 지도자 격으로 위상을 격상시켰다. 국책영화 〈아내들의 행진〉과 〈수녀〉는 도시의 교육이 어떻게 농촌의 무지몽매한 사람들을 깨우고 주변부적 사람을 중심인물로 만들려고 했는지 예시한다. 흥미롭게도 많은 1960년대 영화들이 남성을 마을과 국가의 지도자로 묘사했던 것과 달리 이 영화들에서 여성은 마을을 ‘대통합’하는 산업의 역군이자 마을의 지도자로 위치시켰다. 죽어서라도 자신을 희생한 여성, 말을 할 수 없는 ‘벙어리’로 멸시받던 여성이 마을을 발전시키고 ‘계몽’하여 마을을 통합한다. 그러나 영화 속 국가의 지나친 선전은 오히려 영화적 설득력과 개연성을 잃게 만들며 ‘국책’의 메시지마저 더이상 통하지 않는 유신시대의 ‘말더듬이’ 영화를 생산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