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시절이 있었다. ‘동아기획’이라는 글자만 보고 음반을 사던 시절이 있었다. 카세트테이프를 뜯으면 어김없이 보이던 주황색 라벨에 대한 기억은 지금도 마음을 쿵쾅거리게 한다. 『동아기획 이야기』는 그런 나의 기억이 그저 개인의 차원이 아닌 ‘보편적 상황’이었음을 수많은 자료와 증언을 통해 입증한다. ‘이야기’라는 낱말 안에 음악이 주었던 기쁨과 설렘, 그 음악이 만들어졌던 배경이 정성스럽게 담겨 있다. 그 시절 음악 잡지에는 늘 ‘동아기획이 자랑하는 소중한 음반들’이라는 문구와 함께 광고가 실려 있었다. 그 자랑스러움에 관한 소중한 기록이다. _김학선(대중음악평론가)
남달랐던 기획사의 출현, 믿고 사는 브랜드의 탄생
TV가 아닌 라이브 공연, 그리고 레이블 브랜딩을 통해 틈새시장을 공략하다
음악산업의 패러다임에 균열을 가한 한 기획사의 실험
그렇다면 음반 기획사로서 동아기획은 어떤 곳이었을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동아기획의 ‘대장’으로 불린 김영 대표를 소환해야 한다. 그는 청년문화가 기세를 펼친 1970년대에 기타 학원을 운영하면서 작곡가 및 기타 연주자로 활동한 이력이 있다. 몇몇 음반의 개인 제작자로도 활약하던 그는 1978년 서울 신문로에 아내인 가수 박지영의 이름을 내건 레코드점 ‘박지영 레코드’를 열었다. 이곳에서 4년간 음악산업의 경향과 대중의 소비 동향을 파악하며 그는 새로운 꿈을 꾸게 된다. “시대를 막론하고 좋은 음악은 언제나 대중들의 사랑을 받아왔습니다. 좋은 음악이면 된다는 확신이 있었지요.” 국내 대중가요보다 서구의 팝과 클래식 음반이 훨씬 잘 판매되고, 방송 출연을 통해 얻은 가수의 인기와 음반 판매량이 비례하지 않는 현실을 목도한 이의 확신이었다.
이런 꿈을 품고 1982년 동아기획을 설립한 김영 대표는 좋은 음반을 만들기 위해 과감한 투자를 했다. 당시 국내 최고의 스튜디오였던 서울스튜디오를 녹음실로 선택했고, 뮤지션들은 이곳에서 당대 최고의 가수들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을 들여 음반 녹음에 나섰다. 한편 홍보 방식도 남달랐다. 언더그라운드 가수들이 모여든 작은 기획사로서 과감하게 방송국에 음반을 돌리지 않은 것이다. 초창기에 그는 전국에 있는 레코드점과 음악다방을 공략했다. 레코드점을 운영한 경험이 있기에 떠올린 아이디어였는데, 그런 틈새시장을 노리며 대중들과 만나는 접점을 만든 것이다. 이후 들국화의 첫 음반이 출시되면서 동아기획은 상당한 활기를 띠게 된다. 이때부터는 들국화와 함께 라이브 공연을 진행하는 것으로 홍보 방향을 틀었는데, 공연이 흥행하면서 앨범 판매가 급증하기 시작한다. 당대 대중음악계의 홍보 공식, 가수의 TV 출연을 빗겨가며 성과를 내기 시작한 것이다.
사실 가창력 있고 연주도 탁월한 뮤지션들에게 공연은 무척이나 소중한 것이었다. 즉 뮤지션의 지향과 기획사의 홍보 방향이 합을 이뤄 라이브 공연이라는 장이 꽃핀 셈인데, 들국화 전후로 김현식, 봄여름가을겨울, 신촌블루스 등이 가세하여 적극적으로 공연 문화를 만들어간 것은 동아기획이 한국 대중음악계에 남긴 의미 있는 궤적이다. 이러한 풍토는 뮤지션들의 라이브 음반 발매 등 음반 제작의 확장으로도 이어진다.
또 하나 언급해야 할 지점은 동아기획이 음반 기획사로서의 브랜딩을 시도한 점이다. 사람들은 동아기획의 로고를 ‘웰메이드 음반’을 보증하는 의미로 받아들이면서 동아기획의 음반이라면 믿고 구매했다. 유명 가수가 아니라 신인이나 인지도가 낮은 가수의 음반에도 이 믿음이 통했기에 더욱 의미 있는 현상이다. 또한 동아기획에서는 각각의 음반마다 ‘동아기획 카탈로그’라는 이름으로 제작한, 음반 목록을 정리한 속지를 삽입했고, ‘동아기획 패밀리’ 제도를 도입해 팬들을 끌어모았다. 최대 가입자 수가 5만여 명에 달하는 레이블 팬덤, 이는 동아기획으로선 큰 비용을 들이지 않으면서 지속적으로 음반을 판매할 수 있는 든든한 토대가 되어주었다. 현재의 대중음악계에서도 가수가 아닌 소속사의 팬클럽은 찾아보기 어렵거나 활동이 미비한데, 당시에 이런 기획이 성공을 거두었던 것이다.
당대 대중음악에 의해 포착한 시대의 감수성
1980~90년대 언더그라운드로부터 새로운 감각이 도래하다
젊은 세대의 환호를 끌어낸 음악, 이를 통해 써내려간 당대의 자화상
록과 블루스부터 발라드와 퓨전재즈까지 다양한 장르의 신선한 음악을 선보이면서 대중들과 직접 만나는 공연을 이어갔던 동아기획의 뮤지션들, 이들은 분명 팝이 득세하던 시대의 끝물에 등장해 한국의 동시대적 감각을 대중들에게 선보였다. 이들은 그저 노래만 부르는 가수가 아니라 자신의 곡을 직접 짓고 노래하고 연주하는 적극적인 창작자로 나섰고, 대중들은 이에 환호를 아끼지 않았다. 이러한 뮤지션들을 그러모아 창작의 그라운드를 마련하고 새로운 시도를 펼쳤던 기획사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 저변에는 앨범 출시일을 기다렸다가 동아기획의 음반을 사 모으던, 이어폰을 꽂고서 카세트테이프가 늘어지도록 동아기획의 음반을 들었던, 공연장을 찾아가 목소리를 높여 환호하던 ‘우리’가 있었다. 그러하기에 동아기획의 역사는 곧 한국 대중음악계의 역사일 뿐만 아니라 ‘우리’의 역사 중 하나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