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양 방씨(溫陽方氏) 시조 월봉(月峰) 방지(方智) 선생
1. 신라 귀화와 상주 정착
월봉 방지(方智) 선생은 신라 문무왕 9년(669)에 당나라의 문화 사절로 신라에 방문했다가, 삼강오륜과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과 같은 유교적 도덕 기강이 부재하고 인재 양성을 위한 교육 기관이 전무함을 목격하고 귀화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는 상주(尙州)에 정착하여 5대까지 그 땅에 세거함으로써 ‘상주방씨(尙州方氏)’의 시조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후백제 견훤의 기습으로 상주 일대가 큰 피해를 입으면서 가문은 풍비박산을 맞이했습니다.
2. 온양 이주 및 온양 방씨 시조 성립
이후 방지 선생의 6세손인 방운(方雲) 공은 유리걸식하며 고난을 헤쳐 나와 온수(溫水, 오늘날 아산시 배방읍)로 거처를 옮기고 문무겸전의 역량을 키웠습니다. 유금필(柳金弼) 장군의 천거로 견훤과의 싸움에 참여한 데 이어 고려 초기 거란·여진과의 전투에서 공을 세워 ‘온수군(溫水君, 正一品)’의 작위를 받았습니다. 이후 온양(溫陽), 아산, 신창 일대를 사패지로 받아 세거지를 형성하고 본관을 ‘온양방씨(溫陽方氏)’로 확정지었습니다. 오늘날 아산시 배방읍의 배방산(拜方山)은 그를 경배하는 뜻에서 이름 붙여진 명소로 남아 있습니다.
3. 국학(國學) 창설(신문왕 2년, 682년)
월봉 방지 선생의 가장 큰 공적은 신문왕 2년(682)에 설립한 국학(國學)입니다. 그는 쇠퇴해 가던 유교 기강을 바로잡고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구경(九經)·육례회통(六禮會通) 등 유학 경전을 가르치는 전통 교육 체계를 마련했습니다. 특히 신라말 국문(方言)을 활용해 한자의 음을 반절법(反切法)으로 표기·강의하고, 관청 문서에 쓰이는 이찰(吏札)이라는 문자 체계를 제정함으로써 나중에 훈민정음 창제의 토대를 제공했습니다. 이러한 공로로 그는 한국 유학 전통의 기틀을 세운 ‘한국 유학 종주(宗主)’로 불리기도 합니다.
4. 후손 및 기념
온양방씨 가문은 효행 전통 또한 빼놓을 수 없습니다. 효경(孝經)을 중심으로 한 교육은 가정과 사회, 나아가 왕권 강화의 윤리적 기반이 되었고, 가문 내에는 28명 이상의 효자·효열부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유교적 효행 사상을 통해 사회 통합과 개혁의 기능을 수행한 것은 가문의 자랑스러운 유산입니다.
오늘날 월봉 선생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서는 성균관·향교·유림회 등 관련 기관이 중심이 되어 기념사업회를 발족하고, 국학 설립과 유학 전통 정립이라는 그의 업적을 널리 알리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이를 통해 한국 전통 교육의 뿌리를 지키고, ‘홍익인간(弘益人間)’이라는 교육 이념을 실현하기 위한 역사 문화적 가치를 계승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월봉 방지 선생과 홍유후(弘儒侯) 설총(薛聰)
신라 유학의 새 지평을 연 홍유후(弘儒侯) 설총(薛聰)은, 방지(方智) 선생 문하에서 유교 경전을 깊이 익히고, 이두·구결(口訣) 체계를 집대성함으로써 우리말과 한문을 잇는 가교를 놓은 인물이다. 그의 생애와 업적은 다음과 같은 세 갈래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 사제(師弟) 관계를 통해 이루어진 학문적 토대이다. 태종무열왕 5년(658)경 태어난 설총은, 당에서 귀화한 대유학자 방지 선생이 문무왕 9년(669)에 신라 조정의 요청으로 귀화해 경주 남산 남쪽에 정착했을 때 열두 살 전후의 나이로 제자로 들어갔다. 사람들은 서로를 ‘화산(花山)’과 ‘화천(花川)’이라 부르며 불가분의 사제관계를 맺었고, 설총의 자(字)인 ‘총지(聰智)’ 역시 스승 방지의 ‘지(智)’를 따온 것이다. 이처럼 설총은 스승으로부터 반절법(反切法)의 원리를 전수받아, 한자의 소리를 신라말 방언으로 표기·풀이하는 기법을 확립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였다.
둘째, 이두·석독구결(釋讀口訣)을 통한 언어학적·교육적 공헌이다. 설총은 스승이 전수한 반절법을 바탕으로 『석독구결』을 집대성하여, 9경(九經)을 신라말로 해설·강의하는 국학(國學) 최초의 커리큘럼을 완성했다. 『석독구결』은 단순한 음표기가 아니라, 한자 음(音)과 뜻(訓)을 결합하여 학습자가 국어(國語)로 경전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 혁신적인 체계였다. 특히 그 세분화된 각필구결(角筆口訣)은 일본 가나(仮名) 문자 형성에 결정적 영향을 주었으며(小林芳規), 이후 세종대 훈민정음 창제에 이르는 우리 문자 발전의 첫불을 밝혔다.
셋째, 후대에 미친 장기적 영향과 역사적 의의이다. 설총이 정립한 이두·구결은 고려와 조선시대 관공서의 공문서에 이두를 활용하는 전통으로 이어졌고, 말과 글의 일치(言文一致)를 지향하는 언어학적 토대를 마련했다. 이로써 우리글·우리말로 경전을 해독·교육하는 관습이 형성되었으며, 결국 훈민정음의 창제로 연결되는 중요한 선행 계기가 되었다. 또한 ‘홍유후’라는 관칭은 그가 신라 유학 전통을 견고히 다져 당대·후대에 학문적 위상을 확립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홍유후 설총은 스승 월봉 방지 선생과의 사제관계를 통해 유교 경전을 우리말로 소화·교육하는 혁신적 방법론을 확립하고, 이후 문자와 언어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선구자였다. 그의 『석독구결』과 각필구결은 단순한 기록 기술을 넘어, 한국 학문과 교육 전통의 뿌리를 심었으며, 세종대 훈민정음 창제라는 대역사로 이어지는 밑거름이 되었다. 오늘날 우리는 설총의 공적을 기려, 우리말과 글의 조화로운 발전 역사를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