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를 앞서간 혜안으로 선진국의 청사진을 그리다
총 3장으로 구성된 이 책은 김대중 대통령의 국정 노트와 주요 국정 사안의 막전막후를 통해 그가 ‘성공한 대통령’으로 평가받을 수 있었던 이유를 살펴본다. 1장에서는 대한민국을 선진국 반열에 올려놓은 DJ의 선견지명과 통찰력이 돋보이는 정책들, 그리고 그와 관련된 내용을 적은 메모를 소개한다.
2001년 5월 17일, 김대중 대통령은 전자정부특별위원회 보고회의를 앞두고 국정 노트에 “21세기는 지식 기반 교육 시대이고, 우리 민족에게는 절호의 기회”라고 메모하며 정보화 정책과 전자정부 구축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또 초고속 인터넷 보급에 따른 디지털 디바이드(digital divide, 정보 격차) 문제를 우려하면서 “인터넷 사용자와 못 하는 자, 계층 정보 격차 해소” 대책 마련에 힘써야 한다고 적었다.(25쪽) 사실 그는 오래전부터 정보화 시대를 준비해 왔다. 1981년 군사 법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조사를 받던 도중 잠시 쉬는 동안 수사관에게 ‘세계가 정보화 시대로 갈 것이고 우리도 여기에 뒤처져선 안 된다’며 인터넷의 중요성을 설파했을 정도다.(28쪽) 이런 관심과 노력 덕분에 대한민국은 IT 강국으로 발돋움할 수 있었다.
미래 산업을 내다보는 그의 탁월한 식견과 통찰은 일본 대중문화 개방 정책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1999년 3월 22일, 문화관광부 보고회의를 앞두고 김대중 대통령은 “20세기에는 공업과 노동력이 국력이었다면, 21세기에는 지식과 문화가 중요하다. 문화 산업이 국가 기간산업이 되어야 한다. 21세기는 한국의 세기다. 왜냐하면 문화는 한국인에 가장 적합하기 때문”이라고 적었다.(39쪽) 또 영화·애니메이션·비디오·게임·음반·출판 등 분야별로 한국과 세계 시장 규모를 비교하기도 했다. 당시 일본 대중문화 개방 문제는 정치적으로 ‘뜨거운 감자’였다. 하지만 DJ는 문화 쇄국주의를 배제하고 우리 문화의 저력과 잠재력을 믿었다. 그래서 일본 대중문화를 국내에 개방하는 동시에 국내 문화예술 산업 육성책도 병행했다. 이러한 노력이 K-콘텐츠의 경쟁력을 키웠고 지금의 한류로 이어질 수 있었다.
대한민국이 한 단계 성장하기 위해서는 장기 목표뿐 아니라 당면 과제 해결도 중요하다. 1998년 IMF 외환 위기는 한국전쟁과 비견될 만큼 치명적이었는데, 국민 대다수가 고통과 불안 속에서 좌절과 슬픔을 감내하고 있었다. 그래서 김대중 대통령은 9월 28일 열린 ‘경제 특별 기자 회견’ 준비에 특히 공을 들였다. 한국 경제가 IMF 관리 체제에 들어간 지 10개월 만에 정부의 평가와 입장을 공식 표명하는 자리였기 때문이다. DJ는 예상 질문과 답변을 무려 15장에 빼곡히 정리했는데, 한 사안에 대해 이렇게 많이 쓴 건 이때가 유일하다. “외환 위기 수습과 금융·기업 구조 조정으로 내수 경기 위축이 불가피했지만 내년엔 달라진다. 재정 적자를 감수하더라도 내수 진작책을 총동원하겠다”(94쪽)는 문구에서 알 수 있듯이 김 대통령은 ‘이제 고통은 끝났다. 경제는 좋아질 것이다’라는 희망의 메시지를 국민에게 전달하려 했다. 그리고 독자적 주권 국가로서 경제 정책을 스스로 해 나가겠다는 자신감도 내비쳤다.
이 외에도 김대중 대통령은 대한민국을 복지·인권·성평등 선진국으로 만들겠다는 염원과 의지를 품었고 착실하게 실현해 나갔다. 그 과정에서 국정 노트는 가장 친밀하면서도 든든한 파트너였을 것이다.
용서와 타협, 실용주의 정치로 민주주의를 완성하다
1988년 4월, DJ는 한 인터뷰에서 “멋진 정치란 용서하는 정치다. 역지사지하는 정치라야 비로소 여유가 생기고 화해와 협력의 정치로 승화하게 된다”라고 말했다. 오늘날 한국 정치에 크나큰 울림을 주는 말이다.(181쪽) 2장에서는 김대중 대통령의 영원한 과제였던 대한민국의 민주주의 정착을 위한 용서와 타협의 정치를 살펴본다.
1998년 5월 13일, 김대중 대통령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정치적 고향인 대구를 방문해 대구·경북 핵심 인사 30여 명과 저녁을 함께했다. 그는 만찬을 앞두고 작성한 메모에 솔직한 심경을 담았다. “박 대통령과 나는 한국 정치의 두 축이었다. 서로 미워하고 싸웠던 적대적 관계였지만 이제 그런 과거를 훌훌 털고서 화해하겠다.”(156쪽) 또 생전에 박정희 대통령과 단 한 번도 대화하지 못한 것을 떠올리며 “그때 면담을 받아들였다면 박 대통령이 ‘성공하는 대통령’이 되는 데 도움이 됐을 텐데…”라고 아쉬움을 토로했다.(155쪽) 하지만 이러한 아쉬움과 국가 통합을 위한 의지 때문에 박정희기념관 건립을 결심할 수 있었다.
사실 DJ는 1960년대 후반부터 ‘민주주의 정착과 평화적 정권 교체를 위해서는 정치 보복을 하지 않는 게 필수’라고 밝혀 왔다. 또 ‘용서와 사랑은 진실로 너그러운 강자만이 할 수 있다’는 오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자신을 사형시키려 했던 신군부의 전두환·노태우 두 사람을 사면하고, 재임 중 자주 청와대로 초청한 것은 이런 맥락이다. 1998년 7월 31일, 김대중 대통령은 4명의 전직 대통령(전두환, 노태우, 최규하, 김영삼)을 청와대로 초청해 만찬을 열었다. 만남을 앞두고 DJ는 자신의 감정을 내비치지 않은 채 오히려 “역대 대통령 모두의 노력과 공헌으로 지금의 대한민국이 만들어졌다. 전직 대통령 4명 모두가 역사의 증인이자 주역”이라고 적었다. 또 IMF 극복을 위한 국정 운영에 “특별한 지원을 부탁한다”고 썼다.(162쪽) 김대중 대통령의 포용력도 놀랍지만 무엇보다 ‘국정 운영의 성공’을 다른 어떤 가치보다 우선한 그의 정치 철학을 확인할 수 있다.
성공적인 국정 운영을 위해서는 야당과 소통하고 협조를 얻는 것이 무척 중요하다. 역대 대통령 가운데 제1야당 대표와 영수 회담을 가장 많이 한 이는 총 8번의 김대중이다. 김 대통령은 중요한 정책이나 외교 문제를 야당에 설명하고 이해를 구하는 게 꼭 필요하다고 봤다. 그 점에서 DJ는 철저한 의회주의자였던 셈이다. 2001년 1월 4일,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와의 여섯 번째 만남을 앞두고 “야당을 국정 파트너로 보고 정도로 대응하자. 그리고 할 말은 하자”라고 적었다.(130쪽) 영수 회담의 목적은 정치적 당리당략이 아니라 국정을 같이 협의하는 데 있음을 되새긴 것이다. 그러고 보면 대화의 손은 대통령이 먼저 내밀어야 한다. 대통령에게는 국정 성과를 내야 할 1차적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사명을 DJ는 몸소 실천해 보여 주었다.
혼란의 시대에 필요한 진정한 어른, 진실한 대통령
우리는 그를 ‘어른’이라 칭했다. 연만(年滿)해서가 아니었다. 마땅히 달리 부를 호칭이 없었다. ‘대통령님’으로는 부족했다. ‘VIP’는 불경했다. 그는 대통령이기에 앞서 어른이었다. 어른다운 어른, 시대의 어른이었다. _강원국, 《대통령의 글쓰기》 《강원국의 어른답게 말합니다》 저자
‘국민의정부’ 연설비서관실에서 근무한 강원국 작가의 말처럼 김대중이 ‘시대의 어른’으로 불릴 수 있었던 것은 대통령으로서의 특별한 사명감과 품격을 보여 주었기 때문이다. 3장에서는 이를 확인할 수 있는 에피소드들을 소개한다.
“첫째, 사랑과 관용으로, 그러나 법과 질서를 엄수하자. 다섯째, 대통령부터 국법 준수의 모범을 보여야 한다. 여섯째, 불행한 일도 감수해야 한다. 다만 최선을 다하자. 열다섯째, 나는 할 수 있다.” 1997년 12월, DJ가 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한 직후 쓴 ‘대통령 수칙’이다.(236쪽) 대통령으로서의 태도와 마음가짐이 어떠해야 하는지 스스로 다짐한 글귀를 15개 항으로 정리한 것이다(박지원 의원은 이 ‘대통령 수칙’을 윤석열 대통령에게 꼭 읽어 보라고 조언했다고 한다). 이 중에서 “국회와 야당의 비판을 경청하자. 일반 시민과의 접촉에 힘쓰자. 언론 보도를 중시하되 부당한 비판에는 소신을 바꾸지 말자”는 내용은 김대중 대통령의 소통 스타일과 언론관을 잘 보여 준다. 대통령이란 자리는 모든 정보가 모이는 곳이다. 그래서 자신이 모든 사안을 다 꿰뚫고 있다는 착각에 빠지기 쉽다. 대통령은 자신의 말보다 상대방의 말을 들으려 의식적으로 노력해야 불통 논란에서 그나마 벗어날 수 있다.(55쪽)
김대중은 노무현과 함께 재임 중 가장 많은 기자 회견을 한 대통령이다. DJ는 기자 회견을 국민과 세계에 정책 어젠다와 비전, 메시지를 제시하는 장으로 활용했다. 이를 통해 국민에게 희망과 자신감을 심어 주려고 했다. 반대로 정부의 잘못에 대해서는 솔직하게 사과하고 해명이 필요한 부분에서는 상세하게 설명했다. 실제로 2000~2002년의 신년 기자 회견은 모두 국민에게 사과하는 내용으로 시작했다.(248쪽) 하지만 “대한민국은 지금 세계 일류 국가가 될 절호의 기회다. 화합과 협력 속에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을 후손에게 물려주자. 우리는 할 수 있다”는 메시지로 마무리했다. 이처럼 김대중 대통령은 국민에게 고개 숙이는 데 인색하지 않았고, 국정의 최고 책임자로서 항상 국민에게 부족하다는 마음을 가진 지도자였다.
DJ의 소통과 화합의 정치는 국민, 야당, 정적을 넘어 이념을 아울렀다. 덕분에 분단 이후 55년 만에 최초로 남북 정상의 만남이 성사될 수 있었다. 2000년 4월 11일, 김 대통령은 4·8 남북 정상 회담 합의에 대해 “이번 합의가 박정희 정권의 7·4 남북 공동 성명, 노태우 정권의 남북 기본 합의서 채택의 연장선에 있다”고 적었다. 자신만의 공이 아니라 역대 정부의 성과 위에 서 있다는 겸손과 객관화를 나타낸 것이다.(270쪽) 또 4월 26일 언론사 사장단과의 만찬을 앞두고 “만나는 것만으로도 성공이다. 이것만으로 평화와 협력의 물꼬를 트는 것. 통일보다 냉전 종식·평화 선언이 있어야 한다”고 썼다. 남북 정상 회담 성과에 너무 큰 기대를 갖지 말자고 스스로를 다독이면서, 통일이라는 감상적 목표보다 평화 선언이라는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목표에 집중한 것이다.(271쪽)
하지만 윤석열 정부를 거치면서 남북 관계는 어느 때보다 냉랭해졌고 전쟁의 위험은 도리어 커졌다. 김대중 대통령의 유산은 오롯이 이어질 수 있을까? 시대가 다시 ‘김대중’을 호명하고 있다. 어른이 없는 시대에 지도자다운 지도자의 출현을 고대하고 있다. 이 책은 우리에게도 이런 지도자가 있었다고, 아직 우리에게 기회가 있고 모든 것은 우리의 선택에 달렸다고 일러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