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과 개방의 시대 33년간 대한민국 외교관으로서 전 세계를 누빈 전직 외교관의 대한민국 대외관계 비평서 『명품외교의 길 - 좌파외교관이 보는 한국 외교』가 발간되었습니다.
저자는 1985년 외무부에 입부한 이래 외무부 본부 근무와 워싱턴, 보스턴, 파리, 텔아비브, 하노이, 비슈케크, 바르샤바, 루안다 등 세계 각지의 현장 근무를 수행했으며 코이카 창설, 우리나라의 OECD 가입, 한미 FTA 협상 등의 주요 사업에 관여하고 한미 원자력 협정문 협상 및 보건복지부에서 국제협력업무를 관장한 베테랑 외교관입니다. 33년 간의 외교관 경력을 통해 대한민국의 ‘국제적 위상’에 대한 비판적 관점을 가지게 되었고 그 뼈아픈 성찰의 기록으로 제출된 것이 『명품외교의 길 - 좌파외교관이 보는 한국 외교』입니다.
한국 외교에 대한 저자의 기본적인 문제의식은 ‘숭미’로 표현됩니다. 이는 1954년에 발효한 한미동맹조약과 합의의사록에 규정된 내용에 따라 대한민국의 대외정책에 있어서 미국과의 이해관계 조정이 최우선으로 고려되어야 하는 기본조건과 함께, 대미관계가 일반적인 주권국가 사이의 강대국-약소국의 관계 수준을 넘어선 ‘속국’의 수준으로 전락해서 유지되어 온 것이 한국전쟁 이후 대한민국 외교사의 기본 맥락이라는 것이 저자의 견해입니다.
『명품외교의 길 - 좌파외교관이 보는 한국 외교』는 위와 같은 문제의식을 기본으로 해서 외교현장의 경험을 중심으로 한국 외교의 실태를 소개하고 분석한 내용을 모두 8개 장으로 정리했습니다.
1장 ‘한미동맹의 굴레-스스로 칼을 뒤집어 쓴 쪼다들’은 대한민국 대외관계의 자주성을 근본적으로 제한하는 ‘숭미’ 의식이 외교 현장에서 전개되는 양상을 적나라하게 묘사합니다. 2023년 4월 ‘워싱턴 선언’을 전후한 윤석열 정부의 대미굴종적인 행태가 제시되고, 1995년 9월 한미 자동차 무역협정에서 당시 외교통산부 통산무역실장이었던 한덕수 전 총리의 친미 행태가 고발 및 2007년 한미 FTA 협상 마무리 과정에서 미국 측 대리인에게 겪은 수모 등의 사례가 언급됩니다. 이러한 사례를 통해서 한미 관계의 근본적인 문제와 이로 인해 발생한 상대국인 미국의 고압적인 태도 및 대한민국 외교부의 굴종적인 태도가 빚어내는 씁쓸한 현상에 대한 신랄한 고발입니다.
2장에서 4장까지는 대한민국이 ‘숭미’ 핸디캡을 안고 상대해야 하는 3개의 인접국에 대한 내용입니다. 2장 ‘한미굴레와 한일관계 - 두 식민지의 도토리 키 재기’는 동아시아에서 미국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2개의 ‘식민지’로 묘사하고 있으며, 과거사의 무게가 정상적인 외교관계를 왜곡하고 있는 현상을 극복하는 것이 한일관계 정상화의 돌파구임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3장 ‘중국이 보는 한국 - 장사 말고는 할 게 없는 천덕꾸러기 똘마니…’는 기본적으로 우호적이었던 한-중관계가 2015년 사드 배치를 계기로 악화된 과정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일제강점기에 항일투쟁의 동반자로 한국에 대해서 우호적인 태도였고, 1983년 중국 민항기 사건, 1985년 소흑산도 어뢰정 사건, 1988년 잉창치배 우승 등의 일련의 계기를 통해 1992년 한중수교에 이르는 과정이 서툰 통치자의 판단에 의해 틀어졌으며, 그 결과 막대한 경제적 손실과 함께 대한민국 외교관계의 협소화를 초래한 과정이 통렬하게 소개됩니다. 4장 ‘러시아의 한국인식- 있으나 마나 한 외교관계’는 한미관계에 치우쳐 유라시아 대륙의 강대국인 러시아와의 외교 비중이 취약하게 된 사정에 대한 내용입니다.
5-6장은 유럽과 아프리카를 비롯한 제3세계를 대상으로 하는 대외관계를 다룹니다. 숭미관계의 직접적인 간섭이 아니라 그 파생적인 영향력으로 인해 정상적인 대외정책이 왜곡되는 양상입니다.
7장과 8장은 필자가 생각하는 정상적인 ‘외교’의 개념을 바탕으로 대한민국 외교에 대한 전반적인 비판과 함께 숭미관계라는 왜곡된 조건이 대한민국 외교를 담당하는 ‘외무부’라는 기구와 그 구성원들의 행태에서 관철되는 양상을 고발하는 내용으로 구성됩니다. 미국 일변도의 한국외교로 인해 행동과 사고의 폭이 제한된 외교관들이 친미적인 행태를 통해 개인의 출세에만 관심을 갖는 행태와 함께 “인격, 지식, 주체성과 언행의 품격”과 같은 외교관의 기본 소양이 함량 미달이 아니라 함량 부재의 수준임을 개탄하고 있습니다.
『명품외교의 길 - 좌파외교관이 보는 한국 외교』는 저자 특유의 인문학적 소양과 역사와 사회 현상에 대한 해박한 지식, 외교 현장에서 얻어진 실무 경험이 결합되어 현재 진행형으로 전개되는 우리나라 외교 현실에 대한 근본적이고 총체적인 비판을 제기하는 평론서로서, 세계 각국의 대한민국을 바라보고 평가하는 시선에 대한 역사적 문화적 배경과 함께 외교 현장에서 그러한 평가들이 작동하는 다채롭고 풍부한 사례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언론에서 간략하게 소개되었던 외교 비사들이 상세하게 기술되고 있어서, 우리나라 대외관계 전개의 전반적인 맥락을 새롭게 살필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합니다.
책 제목에서 언급된 ‘명품외교’라는 용어는 2023년 5월 히로시마 G7 정상회의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기시다 총리와 함께 히로시마 원격 피해자를 동반 추모한 것을 두고, 여당인 국민의힘이 "격이 다른 명품외교"라고 자화자찬한 사례를 패러디이며, ‘좌파외교관’ 이라는 표현 역시, 일방적인 ‘숭미관계’에 비판적인 태도를 보인 저자에 대해서 동료 외교관들이 ‘좌파’로 지목한 행태를 비꼰 표현으로 제시되었습니다.
트럼프 대통령 취임으로 국제질서가 혼란스럽게 재편성되고 있는 상황에서, 대한민국 외교가 지향해야 할 새로운 방향설정에 대한 반면교사로서 『명품외교의 길 - 좌파외교관이 보는 한국 외교』의 문제의식이 널리 공유되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