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럭서스란 무엇인가?
플럭서스는 1960년대에 시작된 혁신적인 예술운동으로, 예술가와 작곡가들의 국제적 네트워크이기도 했다. ‘흐르다’라는 뜻의 라틴어에서 이름을 따왔다. 플럭서스의 창립 멤버 중 한 사람이자 주요 조직가였던 리투아니아계 미국인 예술가 조지 마키우나스는 플럭서스의 목적을 “예술의 혁명적 흐름을 촉진하고, 생활 속의 예술을 만드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플럭서스는 실험 음악에서 출발했지만, 곧 모든 예술 장르를 아우르는 움직임으로 발전했다. 1961년 뉴욕에서 첫 행사를 한 후, 뉴욕, 독일, 일본을 중심으로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특히 이들은 “누구나 예술가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바탕으로, 예술이 특별한 사람들만의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참여할 수 있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플럭서스 예술가들은 미술관에 걸린 그림이나 콘서트홀의 음악만 예술인 것이 아니라고 보았다. 그들은 일상적인 행동을 예술로 만들고, 관객이 직접 참여하는 작품을 만들었으며, 우연과 유머를 작품의 중요한 요소로 받아들였다. 오노 요코, 백남준, 요셉 보이스와 같은 혁신적인 예술가들이 이끈 이 운동은, 기존 예술의 경계를 허물고 새로운 예술 형식을 실험했다.
플럭서스의 실험정신과 민주적인 예술관은 오늘날 현대예술의 중요한 토대가 되었다. 이들이 추구한 ‘일상 속의 예술’, ‘모두를 위한 예술’이라는 생각은 현재 우리가 경험하는 다양한 예술 활동의 근간이 되었으며, 예술과 일상의 경계를 허무는 현대예술의 주요한 흐름을 만들어냈다.
이 책을 엮은 켄 프리드먼은 누구인가?
프리드먼은 영향력 있는 플럭서스 연구자로서, 예술가와 학자라는 두 가지 정체성을 통해 플럭서스의 실천과 이론을 모두 아우르는 독보적인 인물이다. 그는 조지 마키우나스와 함께 활동하며 플럭서스 운동의 발전에 깊이 관여했고, 이후 50년이 넘는 세월 동안 플럭서스 운동의 발전과 연구에 헌신해 왔다.
프리드먼의 작품들은 플럭서스의 핵심 가치인 단순성, 유머, 그리고 일상과 예술의 결합을 잘 보여주며, 뉴욕현대미술관(MoMA)을 비롯한 세계 유수의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학자로서 프리드먼은 멜버른 스윈번 대학교 디자인 대학 학장을 역임하며 예술경영, 디자인, 그리고 플럭서스 연구 분야에서 활약했다. 그의 연구는 플럭서스를 단순한 예술운동이 아닌, 20세기 후반 예술과 사회의 변화를 이해하는 중요한 렌즈로 재조명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특히 플럭서스의 이론적 토대를 체계화하고, 이를 현대 예술 및 디자인 교육과 연결시키는 데 큰 기여를 했다.
프리드먼은 플럭서스를 직접 경험한 참여자이자, 동시에 이를 학문적으로 연구하고 분석한 관찰자라는 점에서 특별한 위치에 있다. 그의 저술과 연구는 플럭서스에 대한 실천적 이해와 이론적 분석을 결합하여, 현대 예술사 연구에서 핵심적인 참고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현재도 그는 지속적인 연구와 저술 활동을 통해 플럭서스의 유산을 현대적 맥락에서 재해석하고 발전시키는 데 기여하고 있다.
플럭서스 연구의 결정판 『플럭서스 리더』
『플럭서스 리더』는 플럭서스 운동에 대한 포괄적이고 권위 있는 연구서로서, 현대 예술사 연구에서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이 책이 가지는 학술적 의의는 다음과 같다. 첫째, 플럭서스의 역사적 맥락과 철학적 배경을 체계적으로 정리했다. 둘째, 플럭서스 운동의 주요 참여자들의 생생한 증언과 연구자들의 심도 있는 분석을 함께 담아, 이 운동에 대한 내부자적 시각과 학술적 관점을 균형 있게 제시한다. 셋째, 플럭서스가 현대 예술에 미친 영향과 의의를 심도 있게 다룸으로써, 이 운동의 역사적 중요성을 재조명했다.
요셉 보이스, 딕 히긴스, 앨리스 허친스, 오노 요코, 백남준, 벤 보티에, 로버트 와츠, 벤저민 패터슨, 에밋 윌리엄스 등 1960년대 주요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의 활동을 포함하여, 예술을 전공하는 학생부터 현대 예술에 관심 있는 일반 독자까지 이해할 수 있도록 구성된 이 책은 현대 예술의 중요한 흐름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안내서가 될 것이다. 특히 한국이 배출한 세계적인 예술가 백남준이 플럭서스의 주요 구성원이었다는 점에서, 이 책은 한국 현대예술의 중요한 맥락을 이해하는 데도 핵심적인 자료가 될 것이다.
이 책을 번역한 정유진 역자는 박사논문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이 책을 처음 접했고 “수많은 연구서를 읽어왔지만, 이 책은 마치 보석을 발견한 것 같은 특별한 경험을 선사했습니다. 단순한 정보 전달을 넘어, 예술을 사고하고 접근하는 방식에 대한 새로운 통찰을 제공하는 이 책은, 제 연구에도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한국에는 아직 플럭서스에 대해 이처럼 깊이 있게 다룬 책이 없다는 점에서, 이 책의 번역 출간이 국내 예술계에 중요한 기여가 될 것이라 확신합니다.”라고 밝혔다.
모두가 예술가이고, 예술가이기를 강요받고 있는 ‘예술인간의 시대’에,
‘플럭서스’의 의미는 무엇일까?
“누구나 예술가가 될 수 있다”는 플럭서스의 민주적 예술관은 오늘날 모두가 창작자가 되어가는 시대에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특히 플럭서스가 추구했던 일상과 예술의 경계 허물기는 현대인들이 일상에서 창의성을 발견하고 표현하는 데 깊은 영감을 준다. 그러나 플럭서스의 진정한 가치는 단순한 ‘창작 행위’를 넘어선 더 본질적인 곳에 있다. 현대 사회는 끊임없이 ‘창의적이어야 한다’고 강요하지만, 플럭서스는 이러한 강제된 창의성이 아닌 자발적이고 본질적인 창조성을 추구했다. SNS와 콘텐츠 생산에 집중된 현대의 ‘창작 강박’에 대해, 플럭서스는 ‘무엇을 만들어내야 한다’는 압박이 아닌, ‘존재 자체가 예술’이라는 해방적 메시지를 전달한다.
플럭서스는 예술을 통한 저항과 해방의 가능성도 보여준다. 현대인이 겪는 성과주의와 경쟁 구도, ‘생산성’과 ‘효율성’의 압박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아를 찾는 길을 제시한다. 특히 주목할 만한 점은 플럭서스가 강조하는 공동체적 예술 실천이다. 개인의 ‘인플루언서화’가 아닌, 집단적이고 참여적인 예술 경험을 통해 경쟁이 아닌 협력, 소통, 공유의 가치를 보여준다.
디지털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플럭서스는 기술과 인간성의 균형에 대해서도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백남준의 작업은 기술을 도구로 사용하되 인간성을 잃지 않는 균형 잡힌 접근을 보여준다. 가상현실과 메타버스가 일상화되는 시대에, ‘실제’ 경험의 의미를 되새기게 하는 것이다. 더불어 플럭서스는 예술의 상품화에 대한 비판적 시각도 제공한다. ‘좋아요’와 ‘조회수’로 대변되는 현대 사회의 ‘콘텐츠 상품화’를 넘어, 예술이 삶의 본질적 부분이 되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이는 현대인의 무감각해진 일상 감각을 깨우고, 평범한 순간들의 예술적 가치를 재발견하게 한다.
결국 플럭서스는 ‘예술적 삶’이 특별한 재능이나 기술이 아닌, 관점의 전환에서 시작됨을 보여준다. 이는 예술가가 ‘되어야만 하는’ 현대인들에게, 진정한 예술적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플럭서스와 정치, 플럭서스와 사회
플럭서스와 정치, 사회의 관계는 매우 밀접했으며, 이는 플럭서스가 단순한 예술운동이 아닌 사회문화적 운동이었음을 보여준다. 플럭서스 예술가들은 예술을 통해 당대의 사회적, 정치적 이슈에 적극적으로 개입했으며, 예술의 사회적 역할에 대해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다.
사회적 측면에서 플럭서스는 무엇보다 예술의 엘리트주의를 강하게 거부했다. 미술관과 갤러리로 대표되는 제도화된 예술 시스템에 도전하며, 예술이 특권층의 전유물이 아닌 모든 이의 것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일상의 경험을 예술로 승화시킴으로써 예술과 삶의 경계를 허물고자 했고, 이를 통해 사회 변혁의 가능성을 모색했다. 특히 주목할 만한 점은 플럭서스의 국제적 네트워크이다. 냉전 시기에 동서양의 예술가들이 자유롭게 교류하며 문화적, 정치적 경계를 넘어선 소통을 추구했다는 점은 매우 혁신적이었다. 이러한 국제주의적 태도는 예술을 통한 평화와 소통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정치적 측면에서 플럭서스 작가들의 활동은 직접적이었다. 요셉 보이스는 ‘사회적 조각’이라는 개념을 통해 예술이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주장했으며, 실제로 녹색당 창당에 참여하는 등 적극적인 정치활동을 펼쳤다. 많은 플럭서스 예술가가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는 퍼포먼스와 작품을 선보였으며, 이를 통해 예술이 정치적 발언을 할 수 있는 힘을 입증했다. 플럭서스의 정치성은 기존 예술 제도와 권력 구조에 대한 비판으로도 나타났다. 이들은 상업화된 예술 시장과 제도화된 미술관 시스템에 도전하며, 대안적인 예술 제작과 유통 방식을 모색했다. 값비싼 재료 대신 일상적 사물을 사용하고, 복제와 공유가 가능한 형태의 작품을 만드는 등 예술의 민주화를 실천했다.
이처럼 플럭서스의 사회정치적 성격은 예술운동이 단순히 미학적 실험에 그치지 않고, 어떻게 사회 변화의 동력이 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이다. 이들의 실천은 오늘날 사회참여 예술이나 공동체 예술의 중요한 선례가 되었으며, 예술의 사회적 책임과 역할에서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고 할 수 있다.
플럭서스 예술가 백남준
백남준은 한국에서 주로 ‘비디오 아트의 아버지’로 알려져 있지만, 그의 예술 세계는 훨씬 더 깊고 다면적이다. 특히 플럭서스 운동의 핵심 구성원으로서 백남준의 면모는 더욱 깊이 있게 이해될 필요가 있는데, 이 책은 백남준의 활동과 사상을 플럭서스라는 맥락 속에서 고찰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우선 백남준의 실험정신은 플럭서스와 깊은 연관성을 가진다. 그의 초기 퍼포먼스와 음악 실험들은 플럭서스의 핵심 가치인 장르의 경계 허물기, 우연성의 수용, 관객과의 상호작용을 잘 보여준다. 〈바이올린 솔로를 위한 하나〉와 같은 작품에서 보이는 파격적 실험정신은 단순한 해프닝이 아닌, 플럭서스의 예술철학이 구현된 것이었다.
또한 백남준의 예술관은 동서양의 문화적 감수성을 독특하게 융합했다. 그는 선(禪)적 사고와 서구 아방가르드를 접목시켰고, 이를 통해 새로운 형태의 예술적 표현을 창조했다. 존 케이지의 우연성 음악과 동양적 사유의 만남, 테크놀로지와 인간성의 조화는 그의 작품 세계를 관통하는 중요한 특징이다.
백남준은 일찍이 테크놀로지가 인간성을 위협할 수 있다는 우려를 표명하면서도, 동시에 이를 창조적으로 활용하는 방법을 보여주었다. ‘전자 초고속도로’와 같은 개념을 통해 글로벌 소통의 시대를 예견했으며, 이는 오늘날 인터넷과 디지털 문화를 이해하는 중요한 통찰을 제공한다. 인공지능과 메타버스 시대를 맞이하는 지금, 테크놀로지와 인간성의 조화라는 그의 비전은 매우 시의적절하다. 또한 문화적 경계를 넘어선 소통과 교류에 대한 그의 선구적 통찰은 글로벌 시대의 예술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한다.
더불어 예술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백남준의 생각도 더 깊이 이해될 필요가 있다. 그는 테크놀로지를 단순한 도구가 아닌, 사회적 소통과 문화적 교류의 매개체로 보았다. 특히 그의 작품에서 보이는 유머와 따뜻한 인간애는 차가운 기술을 인간적인 것으로 변화시키는 방법을 보여준다.
백남준의 예술을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그의 기술적 혁신에만 주목할 것이 아니라, 그의 예술철학과 문화적 비전, 그리고 플럭서스와의 연관성 속에서 그의 작품 세계를 총체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플럭서스 예술가와 작품들 : 딕 히긴스와 앨리슨 놀스
마지막으로 플럭서스 예술가들이 어떤 활동을 했는지에 대한 사례로서 여러 플럭서스 멤버 중에서 딕 히긴스와 앨리슨 놀스의 작품에 관해 살펴보자.
딕 히긴스는 ‘인터미디어’(Intermedia)라는 개념을 최초로 제시한 예술가이다. 1966년 그가 발표한 「인터미디어 선언문」은 오늘날 융합예술의 이론적 토대를 마련했다. 그는 시각예술, 음악, 퍼포먼스, 출판을 자유롭게 넘나들며 장르의 경계를 허물었고, 섬씽 엘스 프레스(Something Else Press)를 설립하여 실험예술 출판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특히 그의 〈위험 음악〉(Danger Music) 시리즈는 음악의 개념을 완전히 새롭게 정의했는데, 예를 들어 〈위험 음악 17번〉(Danger Music Number Seventeen)은 “한밤중에 소리 지르기”라는 단순한 지시문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러한 작품들은 일상적 행위와 예술의 경계를 무너뜨리며, 예술이 특별한 기술이나 재료 없이도 가능하다는 플럭서스의 철학을 잘 보여준다.
앨리슨 놀스는 플럭서스의 주요 여성 예술가로서, 특히 일상을 예술로 승화시키는 작업에서 탁월한 면모를 보였다. 그녀의 대표작 〈샐러드를 만드시오〉(Make a Salad, 1962)는 샐러드를 만드는 일상적인 행위를 퍼포먼스로 변환시킴으로써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 작품은 오늘날까지도 전 세계 미술관에서 재연되고 있으며, 일상과 예술의 경계를 허무는 플럭서스의 정신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또한 그녀의 〈커다란 책〉(The Big Book, 1967)은 관객이 직접 페이지 안을 걸어 다닐 수 있는 8피트 크기의 책으로, 책이라는 매체의 개념을 완전히 새롭게 해석한 혁신적인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