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일무이한 예술적 궤적을 밟은 예술가
1886년 오스트리아의 작은 도시 푀흘라른에서 태어난 코코슈카는 빈에서 국립실업학교를 졸업한 후 미술 교사의 추천으로 국가 장학금을 받고 고등 직업 예술 학교인 빈 공예학교에 입학했다. 당시 이 학교에 지원했다가 낙방한 학생 중에는 아돌프 히틀러도 있었다고 전해진다. 이 시기부터 코코슈카는 현대 건축의 선구자로 평가받는 아돌프 루스의 영향을 받아 당시에 지배적이던 아르누보 양식을 거부하고 전통적인 회화 기법과는 전혀 다른 대담한 구성과 강렬한 색채로 예술계에 충격을 안겼다. 그뿐만 아니라 《살인자, 여자들의 희망》과 같은 희곡을 발표해 빈 예술계의 악동, ‘최고 야수’로 불리며 주목받았다.
알마 말러의 남자 또는 알마 인형을 만든 남자
코코슈카의 이름이 예술계를 넘어 널리 알려진 이유는 그의 작품뿐만 아니라, 구스타프 말러의 미망인인 알마 말러와의 강렬한 사랑 때문이다. 야성미와 교양을 겸비한 알마와의 관계는 코코슈카에게 창작의 원천이었지만, 이 사랑은 동시에 그를 파괴적인 집착과 고통으로 몰아넣었다. 알마와 3년간 동거하는 동안 거의 병적인 집착과 질투심에 내몰린 코코슈카는 그녀와 관련한 450여 점의 예술 작품을 낳는 광란의 창작 활동을 벌였다.
코코슈카가 둘의 아이라고 믿으면서 반대했던 낙태 수술을 알마가 결행하면서 두 사람은 결국 결별에 이르렀고, 얼마 후에 알마는 바우하우스의 창립자인 건축가 발터 그로피우스와 재혼했다. 알마와의 이별은 코코슈카에게 두 가지 꼬리표를 남겼다. 하나는 〈바람의 신부〉라는 걸작의 작가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알마 인형’을 만든 남자라는 것이다.
〈바람의 신부〉(1914)는 두 사람의 사랑과 갈등을 담은 작품으로,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붓놀림과 강렬한 색채로 가득 차 있다. 작품 속 신부는 알마를 상징하는데, 그녀를 떠올리며 느낀 희열과 고통이 캔버스 위에 고스란히 녹아 있다.
알마를 잊지 못한 코코슈카는 실연의 아픔을 달래기 위해 실물 크기의 알마 인형을 인형 제작자에게 의뢰했다. 그는 이 ‘리얼돌’과도 같은 알마 인형에 옷을 입히고 오페라 공연이나 카페에 데려가기도 했으며, 이 인형을 소재로 한 그림을 여러 점 그리기도 했다. 하지만 실물과 너무 다른 인형의 모습에 환멸을 느낀 그는 인형을 폐기했다고 전해진다. 이 책의 저자는 코코슈카가 인형 제작자에게 전달한 정보와 지침이 자세히 실려 있는 편지들을 인용하면서 이를 젠더 담론의 관점에서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묻는다. 이 인형이 사랑의 대상을 물신화한 천박한 사례인지, 아니면 실연과 집착이 만들어낸 예술적 은유인지에 대한 판단은 독자의 몫으로 남겨두고서.
붓과 펜으로 한 시대 선언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코코슈카는 실연의 아픔을 떨쳐버리기 위해 오스트리아 기병대에 자원입대했다. 이미 실연으로 깊은 상처를 입었던 그는 입대 전부터 심리적으로 상이병(#? 상사병)이나 다름없는 상태였다. 이후 두 차례의 전쟁은 코코슈카의 삶에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겼다.
1930년대 나치 정권은 코코슈카의 예술을 ‘퇴폐미술’로 규정했다. 이때 코코슈카는 영국으로 망명해 파시즘과 나치즘에 저항하는 예술을 창작했는데, 이를 대표하는 작품이 〈붉은 달걀〉이다. 이 작품은 붓으로 시대 선언을 한 사례로, 예술이 어떻게 정치적 도구가 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이 책은 코코슈카의 냉철하고 신랄한 정치적 시각을 엿볼 수 있는 다수의 글을 면밀히 살핀다. 저자에 따르면 코코슈카의 정치적 시각은 ‘보기’에 대한 신념과도 관련이 있다. 사회 상황을 바라보는 시선과 정치적 미화를 경계하는 태도는 그의 조형예술 작품에 그대로 녹아들었다.
색채의 철학자가 그린 초상화
코코슈카의 작품에서 초상화는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 그는 체코슬로바키아 대통령 토마시 마사리크, 독일 정치가 테오도르 호이스, 콘라트 아데나워, 헬무트 슈미트, 그리고 음악가 파블로 카살스와 소설가 애거사 크리스티까지 다양한 인물들의 초상화를 그렸다. 코코슈카는 초상화 속 인물들의 얼굴을 ‘영혼의 이미지’로 간주하며, 이를 통해 개인과 시대의 복잡한 관계를 형상화하고자 했다.
코코슈카의 초상화는 단순한 인물 묘사를 넘어 인간 본질에 대한 깊은 탐구로 이어진다. 모델의 외적 특성뿐 아니라 내면세계와 시대적 맥락을 담아내는 데 주력했으며, 이를 통해 인물의 심리적 긴장감을 드러냈다. 또한 배경과 사물을 활용해 모델의 정체성과 상징성을 표현했는데, 특히 군수업자 뷔를레와 같은 인물들의 초상화에서는 권력의 양면성과 시대의 모순을 은유적으로 드러냈다. 코코슈카는 이러한 초상화 작업을 통해 예술이 인간과 권력의 모순적 관계를 탐구하고 비판하는 중요한 도구임을 보여주었다.
이 책의 저자는 동물, 풍경, 도시, 음악, 신화를 그린 작품들도 ‘초상화’의 영역에서 다루는 시도를 한다. 인간의 초상화와 동물의 초상화 사이의 관계나 도시와 풍경의 관계 속에서 코코슈카의 작품을 조명하고, 이와 연관된 추상미술에 대한 그의 비판적 시각을 다룬다.
눈이 걸음마를 배우는 곳, 시각 학교
코코슈카는 1953년 잘츠부르크에서 잘츠부르크 국제여름미술아카데미를 설립하며 자신의 예술적 비전을 실현하고자 했다. 그는 이 아카데미의 중심을 ‘시각 학교’로 삼아 학생들에게 ‘자신의 눈으로 보는 법’을 가르치려 했는데, 이는 단순히 예술 기술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시각적 경험을 바탕으로 세계를 새롭게 이해하도록 돕는 교육이었다. 코코슈카는 학생들에게 시각적 경험을 단순히 수동적으로 받아들이지 말고 스스로의 시선으로 체험하고 탐구하라고 가르쳤다. 이와 같이 시각 학교는 현대 사회에서 점차 약화되는 독립적이고 능동적인 관찰 능력을 회복시키려는 코코슈카의 철학적 시도였다. 그는 추상미술을 비판하면서 인간적이고 구체적인 시각을 예술 교육의 핵심으로 삼았는데, 예술이 단순한 미적 즐거움을 넘어 인간성과 존재에 대한 깊은 통찰을 제공하는 매개체가 되어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 아카데미는 전 세계에서 모여든 학생들에게 깊은 영감을 주었으며, ‘시각적 사고와 창의성’을 강조하는 독창적인 교육 철학을 제시했다. 이러한 철학은 현대 예술 교육에도 여전히 강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평생 코메니우스를 좇은 인본주의자
코코슈카는 20세기 예술사에서 인본주의적 관점으로 독특한 발자취를 남긴 인물이다. 그는 철학자(#체코 철학자) 코메니우스의 영향을 받아 교육과 예술의 통합을 꾀하면서 인류의 더 나은 미래를 꿈꾼 인본주의자로도 평가받는다. 그의 희곡 《코메니우스》는 이러한 이상과 철학을 극적으로 표현한 작품으로, 코메니우스의 망명 생활과 이상주의를 통해 세계 평화에 대한 메시지를 전한다.
이 책의 저자는 전쟁과 재난으로 고통받는 아이들을 위해 기금을 마련하고, 전쟁에서 부상당한 젊은이들을 위해 의수를 제공했던 코코슈카의 활동과, 가족이나 친구들에게 보낸 걱정 어린 편지들을 통해 그가 흔히 알려진 ‘이기주의자’라는 통념과 상반되는 인물임을 보여준다. 코코슈카의 예술은 자의로 그리고 타의로 선택했던 방랑자로서의 삶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60년 동안 국경을 넘나든 그의 삶은 글과 그림으로 고스란히 표현되었는데, 그중에서도 그의 풍경화는 단순한 자연의 재현을 넘어 인간적 희망과 내면의 풍경을 담아낸 것으로 평가받는다. 잘츠부르크와 제네바 호수를 배경으로 한 그림들은 그의 예술적 탐구의 핵심인 ‘인간다움’을 상징하며, 예술이 시대적 고난 속에서도 인간의 가치를 드러낼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 책은 오스카 코코슈카의 삶과 예술을 시대적 맥락에서 심층적으로 탐구하며, 그가 왜 20세기 예술계의 독보적 인물로 평가받는지를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저자 괴르너는 코코슈카의 작업실, 망명지, 전시회 등을 성실하게 추적하면서 그의 예술적 여정을 생생히 복원해낸다. 이를 통해 독자들은 코코슈카의 작품이 단순히 과거의 유산을 넘어 지금의 사회적, 정치적, 인간적 문제를 성찰하게 만드는 힘을 가졌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에 앞서 예술과 인간성에 대한 깊은 질문을 던졌던 코코슈카와 그의 작품을 새로운 방식으로 접근하고 이해하는 뜻깊은 시간을, 그리고 열린 시각과 길을 갖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