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미술과 이미지는 불가분의 관계를 이룬다. 김범 역시 미술가로서 기본적으로 이미지를 다룬다. 그런데 김범이 다루는 이미지는 눈에 보이는 현실의 표면적인 이미지와 더불어 경험, 기억, 가정, 연상 등을 통해 머릿속에 그려질 법한 이미지를 포함한다. 대상을 묘사하는 재현 대신 인식을 통해 다르거나 새로운 실재를 바라보도록 유도해 온 작가는 이미지를 다루면서 이미지의 실재성(actuality)에 질문을 던진다.
“저는 인간의 삶이 주로 인식을 바탕으로 한다고 생각합니다. 대체로 물질적이고 감각적인 실체의 세계를 살고 있는 듯하지만, 어떤 의미에 대한 기표는 경우에 따라서는 꼭 어떤 특정한 모습이 아니어도 되며, 심지어 이름이나 기호만 있어도 됩니다. (…) 때때로 저는 제가 무엇을 주시하며 바라볼 때조차 제가 무엇을 보고 있는 것인지 의아할 정도입니다. 그러다 보니 제 작품에는 이러한 질문들이 종종 담겨 있습니다.”(김범, 「김범 인터뷰, 2022년 11월」, 241쪽)
“기본적으로 ‘이미지’의 문제는 김범 작업의 핵심이다. 그는 관람자의 ‘마음’에 ‘이미지’를 만드는 데 관심을 가져 왔다. 김범은 ‘마음에 품은 시각적 이미지’는, 사실 이미지를 보지 않고도 만들어질 수 있다고 믿는다. 이미지를 ‘시각적 현실’이 아니라 ‘실재적 현실’로 접근하는 태도. 즉 김범에게는 ‘어떻게 보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볼 수 있도록 만드는가’가 화두이기에, 궁극적으로 그는 ‘시각’이 아니라 ‘시각성’의 문제를 다룬다고 할 수 있다.”(이설희, 「김범의 가정법」, 136-137쪽)
보는 이가 스스로의 인지 작용을 돌아보게 만드는 가정적인 상황을 제시해 시각적 눈속임을 만드는 작가의 ‘다르게 보기’는 한눈에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고, 냉소적이거나 부조리한 유머로 다가오기도 한다. 이러한 ‘다르게 보기’를 통해 “인간의 지각이 기본적으로 의심되는 세계”(7쪽)를 다루는 김범의 작품은 그가 “거꾸로 생각하게 만드는 작가”이자 “거꾸로 걷는 작품을 만드는 작가”(야코브 파브리시우스, 「기들만 과효시착」, 152쪽)임을 보여 주며, 나아가 “평면에 대한 부정과 긍정 사이의 변증법적 운동”을 통해 “타자”에 가까운 회화의 이미지를 “‘이따금’의 시간성”으로 드러낸다(장지한, 「제의의 장소」, 216-218쪽).
언어
미술가 김범은 언어를 작업의 주요한 도구로 사용해 왔다. 작품의 내용에 따라 회화, 조각, 설치, 영상, 책 등 여러 유형의 매체를 다뤄 온 김범은 “‘문장’을 통해 가상 상황을 설정”하는 “‘가정’의 방법론”(49쪽)을 구사한다. 작품에 문장이 적혀 있는 김범의 초기 ‘지시’ 작업은 지시의 내용에 따라 가정해 보면서 이미지를 심상으로 재현하도록 이끈다. 이렇게 글과 언어로 미술의 영역을 확장한 김범의 작업은 『변신술』(1997), 『고향』(한국어판 1998/영어판 2005), 『눈치』(영어판 2009/한국어판 2010)와 같은 ‘책’이라는 실물로 이어졌다. 『변신술』은 인간을 가변적인 존재로 상정하고서 인간이 나무, 문, 풀, 바위, 냇물, 사다리, 표범, 에어컨으로 변신할 수 있는 방법을 지시문 형식으로 구성한 지침서이다. 『고향』은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에 있는 운계리라는 마을”에 대한 안내서로, 이 가상의 마을을 누구든 자신의 고향으로 삼을 수 있도록 글로써 이미지를 만들어 간다. 『눈치』는 “인식 대상으로서의 어떤 개”를 그린 이야기책으로, “허구의 이미지를 현실적 차원에 구현해 나가는 행위를 은유”(김범, 「김범 인터뷰, 2022년 11월」, 243쪽)한다. 한편 2016년부터 최근까지 이어지고 있는 ‘무제 석판화’ 연작에서는 검은 색면 아래에 원판의 역(逆)으로 찍히는 석판화의 특성을 이용해 거꾸로 드러난 텍스트가 자리하는데, 거꾸로인 데다 내용마저 추상적이고 모호해 역시 추상적으로 보이는 색면과 연결시키기 어려운 이 작업은 인간의 인식의 허술함을 드러낸다.
이렇듯 미술가 김범의 작품 세계에서 ‘이미지’와 ‘언어’는 이미지의 실재성에 질문을 던지면서 이미지의 타자성을 환기시킨다. “이해하는 내용보다는, 이해할 수가 없기에 계속 생각하게 되는 내용에 대해 더 많이 작업”(238쪽)해 온 그에게, 그리고 그처럼 무언가를 만드는 이들에게, 언제나 “현실화되어 가는 대상”(230쪽)이 함께한다. 작품이라는 대상은 그렇게 계속 존재하는 것이 되어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