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하이 독립운동가의 집에서 한국 정치의 중심부까지
좌절과 절망 위에 도전과 희망으로 그려낸 풍경
이종찬의 90년 삶은 대한민국의 시간과 오롯이 함께했다. 그는 1936년 독립운동가들의 망명지이자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발상지인 중국 상하이의 프랑스 조계에서 우당 이회영 선생의 손자로 태어났다. 10대 소년 시절 광복과 함께 환국해 학창 시절을 보내는 동안 그가 어려서부터 존경했던 백범의 갑작스러운 죽음, 곧이어 닥친 한국전쟁의 비극, 이승만 정권의 부정과 몰락 등 정국의 극심한 혼란을 직접 목격하는 가운데 인생의 길을 가다듬게 된다. 이때 그는 신흥무관학교를 세운 그의 조부 우당 이회영 선생의 길을 따라 참여와 행동으로 나라의 진운과 함께할 방도를 모색하며 군인의 길을 선택했다. 그렇게 군에 봉사하는 과정에서 일찍이 ‘정보’의 중요성에 눈을 떴다.
이종찬은 1965년부터 1980년까지의 격변기에 국가 정보기관에 복무하며 수많은 역사의 현장을 지켜보았다. 각종 간첩단 사건과 무장공비 침투 사건, 이후락을 중심으로 한 중앙정보부의 선거 공작과 7·4 남북공동성명, 10월유신과 윤필용 사건, 10·26 사건 등이 그것이다. 이를 통해 그는 나라의 살림살이와 위기관리, 사회 각 분야의 운영과 소통, 대립하는 입장의 조율 등이 얼마나 중요한지 실감하고 체득했다. 그 과정에서 철저하게 ‘익명의 삶’을 살았다. 그는 세대를 앞서 그렇게 익명으로 살았던 조부 이회영의 정신과 삶이 자신에게서 똑같이 나타나는 것을 깨닫고 ‘역사의 계승’에 무거운 책무감을 가졌다.
이종찬은 1980년 새로운 환경에서 새로운 기회가 주어지자 이를 적극 활용해 시대와 나라가 요구하는 새로운 정치의 길에 나섰다. 제11대부터 제14대 국회까지 줄곧 서울 종로·중구 또는 종로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된 그는 민의의 엄중한 요구를 행동의 토대로 삼았다. ‘51% 의회주의자’를 자임한 그는 여당 안의 누구보다 국민 앞에 겸허했으며, 야당과의 대화에서 국회 운영의 가장 중요한 토대를 찾았다. 이 시절 그는 자신이 속한 민주정의당을 ‘민족의 정당’, ‘역사 앞에 부끄러움이 없는 정당’으로 만들고자 했으나, 그것은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결국 1990년 무원칙한 3당 합당과 1992년 변칙적인 대통령 후보 경선을 거치면서 이종찬은 자신의 손으로 만들고 10여 년 동안 몸담았던 당을 떠나 한국 정치의 미래와 자신의 행보를 원점에서 재검토하는 모색기를 보냈다. 이 시기는 그에게 쓰라린 좌절과 고통을 안겨주기도 했지만 그동안 걸어온 길을 자유롭고 허심탄회하게 돌아보며 새로운 정치의 가능성을 탐색하는 값진 시간이기도 했다.
그런 모색은 귀중한 결실을 낳았다. 이종찬은 역사의 요청에 따라 1995년 야당인 새정치국민회의에 참여했고, 마침내 1998년에 ‘국민의 정부’가 탄생하면서 자신이 주장해 온 ‘수평적 정권 교체’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국가 정보기관의 수장으로 돌아와 이 기관의 개혁에 중요한 토대를 놓았다.
이종찬은 20년에 걸친 자신의 정치 인생에 대해 “‘진보적 보수’로 평가받기를 희망했지만 ‘태생적 보수’의 경계를 넘어서지 못했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국회의원으로 4선을 했지만 성공한 정치인은 아니”라고 냉정히 자평한다. 하지만 그의 삶의 스펙트럼을 마주한 사람이면 누구나 그런 겸손한 자평 너머에 그가 ‘자유인’인 동시에 ‘민족주의자’로서 걸어온 경이로운 행로와 만나게 된다. 그 행로는 결코 예측 가능한 것은 아니었으되 우리 사회의 상식과 열망에 부응하는 것이었으며, 이종찬 개인의 꿈을 모두 실현한 것은 아니었으되 한 인간이 의지와 성찰과 결단을 통해 한국 현대사에서 감당해야 했던 분투 과정의 어떤 경지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종찬의 삶은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정권에 이르기까지 대한민국 현대 정치사의 숲을 가로지른다. 그래서 이 책은 이종찬의 삶을 돌아보는 사적인 기록인 동시에, 그가 큰 기대를 안고 때로는 그만큼 큰 좌절을 맞보며 몸소 부딪혀 온 대한민국 정치를 낱낱이 고하는 공적인 기록이기도 하다. 그의 조부 이회영이 그러했듯 이종찬은 무엇에도 속박되지 않은 삶을 살고자 분투했다. 하지만 우리가 이미 알고 있듯이 그가 살아온 시간과 공간은 그를 자유롭게 내버려두지 않았고, 그의 삶 역시 동시대의 대한민국 역사만큼이나 부침을 거듭했다.
이 회고록은 총 2권, 15개 장으로 구성되어 시간의 순서에 따라 이야기를 풀어간다. 1권(1~8장)은 해방 이후 귀국해 육군과 중앙정보부를 거쳐 제11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활동하던 시기까지 다룬다. 이어서 2권(9~15장)은 제12대 국회의원 시절부터 시작해 직선제 개헌과 노태우 정권의 탄생, 3당 합당 이후의 방황, 그리고 사상 최초의 수평적 정권 교체를 이루어내고 김대중 정부의 초대 국가정보원장에 취임해 이 기관을 개혁하는 시기까지 다룬다. 이번에 새로 출간하는 제2판에서는 ‘에필로그’를 통해 ‘1948년 건국절’ 논란에 대한 그의 통렬한 비판을 담았다.
이제 이종찬이 걸어온 길에 대한 평가는 온전히 독자의 몫으로 남았다. 그리고 그러한 평가가 그가 살아온 시간들의 연장선상에 놓인 우리의 미래를 가꾸는 데 작은 밑거름으로 쓰인다면, 이 책은 역할을 다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