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 후기』 작가 오경철의 신작 에세이
아무튼 시리즈 예순다섯 번째 주제는 헌책이다. 더 정확히 말해 “아무개가 소유했으나 짐작하기 어려운 온갖 사연을 안고 세상에 흘러든” 헌책을 모으는 일에 관한 이야기이다. 책 만드는 사람의 기쁨과 슬픔을 정제된 언어로 노래한 『편집 후기』 오경철 작가의 두 번째 산문집으로, 헌책에 대한 그의 “작고 수수한 사랑의 기록”을 담았다.
“자립을 한 뒤로 줄곧 책을 만들면서 먹고살아왔으니 독서야말로 명색 편집자라는 내 지난날의 직업과 다름없는 위상을 가졌어야 마땅하지만, 나는 문사철(文史哲)의 우뚝한 고전들을 비롯해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양서를 부지런히 읽으며 두뇌를 단련하고 고급한 교양을 쌓기보다 대부분은 내가 알 리 없는 아무개가 소유했으나 짐작할 수 없는 온갖 사연을 안고 세상에-그러니까 헌책방에-흘러든 책들에 걷잡을 수 없이 매혹되어 성실한 독서가가 되기 위해 걸었어야 할 길에서 탈선해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어떤 헌책이든 그저 헌책일 뿐이라서 나는 그것을 사랑해마지않는다
오랫동안 종이책을 만들어온 그의 첫 책 『편집 후기』가 생업의 결과물로서(편집자로서) 비교적 객관적인 시선을 유지한 채 책과 출판계를 바라보았다면, 『아무튼, 헌책』은 순수한 취미로서(독자로서) “건조한 일상에 잔잔한 활력을 불어넣”는 책 수집의 즐거움을 전한다. 그중 가장 큰 행복은 사들인 헌책들의 빛바랜 책갈피마다 잠들어 있던 오래된 자국과 이름과 기억 들이 깨어나 서로를 연결하는 세계를 탐험하는 일이다. 책장을 펼치면 어린 시절부터 한국문학에 심취해온 저자가 헌책과 헌책방에서 발굴한 흥미로운 이야깃거리로 가득하다. 이태준, 정지용, 박태준 등 전근대의 진귀한 고서들에 관한 비화부터 김현과 오규원, 김종삼과 최승자, 김화영과 장정일 같은 우리가 사랑한 작가들의 숨은 이야기까지, 가히 그만의 작은 문학사라 할 만하다.
“오래전에 강남의 어느 헌책방에 놀러 갔다가 내가 무던히 좋아하는 한 시인의 오래된 시집-그의 첫 시집이다-을 구한 적이 있다. 그것은 그가 또 다른 시인-지금은 여기에 없는-에게 건넨 책이었다. 표지를 펼치고 그의 성글고 흐릿한 글씨를 가만 들여다보노라면 마치 자신의 첫 시집을 펼쳐 이름을 적어 넣고 있는-아마도 미간을 찌푸리고 담배를 피우며-그의 기억할 만한 생의 한순간을, 그 떠나버린 시간을 내가 비밀리에, 잠시나마 오롯이 소유한 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 이 책을 발견하여 갖지 못했더라면 결코 경험할 수 없었을 일이다. 1981년 9월 20일에 처음 발행된 이 시집은 “우리들의 시인, 최승자”의 『이 時代의 사랑』이다.”
신촌의 숨어있는책, 인천 배다리의 아벨서점 등 헌책방 순례기도 흥미롭다. 더불어 전국의 헌책방을 다니며 나름의 기준과 안목으로 책을 고르는 일에서부터 그것들을 집에 들이고 살피고 관리하는 법, “비좁은 집이 책의 포화 상태를 극사실주의적으로 전시”하는 지경에 이르러서야 헌책을 내다 파는 상황까지, 헌책 수집가의 일상을 들여다보는 것도 이 책이 주는 큰 재미이다.
“나는 몇 권의 허름한 책을 주섬주섬 챙겨 책값을 계산하고 헌책방을 나온다. 책 꾸러미를 바리바리 들고 느지막이 집에 들어오면 나는 몸을 씻고 나와서 책상 앞에 앉아 그날 취득한 책들을 한 권 한 권 꼼꼼히 한 번 더 검수한다. 그렇게 살균수와 티슈로 구석구석 소독하고 닦은 뒤에-코팅이 되어 있지 않은 책은 먼지를 떨어내고 베란다로 가져가 얼마간 바람을 쏘이고 볕에 말린다(옛말로 ‘포쇄曝曬’라고 한다)-비로소 그 책들과 대면한다. 내가 감응하는 것은 그 책들 자체이기도 하고 그것들과 동일시되는 텍스트이기도 하다.”
“책에 남은 어떤 흔적은 그 자체로 눈부시게 강렬하다”라는 책의 한 구절처럼, 『아무튼, 헌책』은 그 흔적들이 만들어낸 소우주로 독자들을 이끈다. 세상에 나오자마자 금세 잊히고 말지만, “우리가 잘 알거나 아니면 전혀 알지 못하는 장소들로” 흩어져 죽음과도 같은 잠에 들지만 결국은 다른 누군가에게 기어이 발견되어 새로 깨어나는 책의 운명을 좇다 보면, 서가에 무심하게 꽂힌 책들이 예사롭지 않게 보이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당신은 이미 그 세계에 첫발을 내디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