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설
이진주의 시세계
강희근 경상국립대학교 명예교수
1.철학적 언어
이진주의 시는 현대시가 지니는 철학적 사유의 깊이가 있다. 그렇다고 지나치게 난해하거나 제 홀로 달아나거나 갔다가 돌아오는 언어는 아니다. 코드를 따라 읽으면 깊이가 있고 말맛이 나서 재미있다. 시 「분기점」이 그런 시다.
나는 얼굴이 없습니다
목적지를 단단히 입력해 주셔요
자!
달리고 달립니다
어판장 건물이 보이고 갈매기떼 모여들었다
빈 하늘에 흩뿌려집니다
졸음 쉼터가 보이네요
안심하셔요 나는 졸지 않습니다
분기점이 문어발처럼 갈라져도
나는 웬만해선 헷갈리지 않습니다
당신이 믿어만 주신다면
당신이 지나온 길 어땠나요
갈래 길 앞에 서서 헤매진 않았나요
나는 발자국이 없습니다
삐-
경고문이 울립니다
너의 동선은 기록된다
너의 과오는 지워지지 않는다
나는 얼굴이 없습니다
예쁜 목소리가 있죠
당신의 경유지와 목적지는 기록됩니다
시 전문이다. 나는 얼굴이 없으므로 목적지가 분명히 입력되어야 실체를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앞으로 달리는데 금새 어판장 건물이 보이는 바닷가에 이른다. 졸음 쉼터가 있고 분기점이 문어발처럼 갈라지지만 나는 헷갈리지 않는다. 당신은 어땠나요? 헤매진 않았나요? 나의 경우 발자국이 없어서 경고문이 울리지요. 그러나 너의 동선은 기록되고 너의 과오는 지워지지 않는다.
나는 여전히 얼굴이 없고 목소리가 있을 뿐이다. 시에서 나와 너는 서로 대척지점에 있지만 서로가 다르지 않고 애매하다는 점에서 일치하고 있다. 본문에서 “당신이 믿어만 주신다면”이라 하여 불신하고 있다는 점에서 비극이다. 인간은 갈래지는 분기점에서 동일하게 과오와 동선을 지니는 존재다. 그 사유가 철학적이다.
그 다음에 나오는 시 「나를 자르다」도 사유의 언어다.
나는 가끔 영혼의 조각을 잘라낸다. 오랜 견딤이 통증을 뚫고 머리를 내밀 때, 녹슨 기억을 잘라내는 일은 영혼의 묵은 때를 밀어내는 카타르시스.
-「나를 자르다」에서
“영혼의 조각을 잘라낸다”나 “견딤이 통증을 뚫고 머리를 내밀 때”라는 동사적 상상이 사유다. 이진주는 확실히 이전의 시에 비해 언어적 질감이 단단하고 오징어 다리 씹듯이 씹는 대로 진한 맛갈이 드러난다.
2. 사색, 눈물, 통점의 시
이진주의 시는 사색이 단단하다. 그것은 인생적 탐구에 이른다.
하루에도 몇 번씩 칼춤을 춘다.
나의 등에
피비린내 어른거린다
퍼덕거리는 삶의 단말마
나는 등을 내밀어 아픔을 받아낸다
절절 아우성이 빗금을 긋는다
웃통을 벗은 인부의 등에
빗살무늬 붉은 꽃들이 피어 있다
무게가 피운 꽃송이에 단단한 사랑이 맺혀 있다
정녕
그의 가게에 하얀 웃음꽃이 피어났을까
수많은 칼자국이 사선을 긋는다
칼날을 받아낸 무수한 빗금들
등을 내놓는 일이 나의 삶이다
-「빗살무늬 꽃」
등을 내놓고 사는 인생은 급기야 피비린내 저며 나는 칼자국을 받아낸다. 그것은 무게가 피운 꽃송이이고 사랑이 맺혀 있다. 아울러 칼춤이 되고 사선이 되는 그림이기도 하다. 빗살무늬인 화폭이다. 인생적 탐구가 매우 독특하여 거기서 통점이 흘러나온다. 이시인은 이 시를 진주검무에서 발상을 받은 것인지도 모른다. 춤은 동작이고 제향적 별제(別祭)를 이끌어낸다.
시인은 빗살무늬에서 눈물샘으로 전이하여 자아의 껍질을 벗기기도 한다. 시 「눈물방울」이 그러하다.
나는 울고 싶을 때
눈물의 나이테가 겹친 양파를 벗긴다.
깊숙한 곳
아픔의 결절을 꺼내어 본다
-「눈물방울」
비정상으로 커진 덩어리에서 아픔을 확인하는 것이다.
3. 시의 본질, 이름다운 서정
이진주에게는 「고마리꽃」이나 「라일락 의자」 같은 아름다운 서정에 깊숙이 빠져든 경우가 있다. 한 번 들여다보자.
지붕 낮은 집들이 모여 있는 동네
달빛처럼 눈썹에 거미줄 달라붙고
알전구는 이유 없이 아슬아슬하다.
먼저 떠난 이를 위해 작은 창을 열어두고 잠든 집 있다. 무허가 주택엔 꿈도 휘어져 복원력이 필요한 듯 끊임없이 널빤지 소리 들린다. 그렇지만 아무도 희망을 뭉개지 못한다. 해가 뜨면 발꿈치를 살짝 들고 산을 오르는 사람들, 마천루보다 더 아름답다고 말한다. 쪽방에 살아도 누울 곳이 있어 행복하다고. 붉은 모자를 쓴 성자들이 낡은 평상에 모였다. 서로를 바라보는 이웃들, 멀리 어디선가 성당의 종소리 들려온다. 또 누군가 비좁은 골목을 벗겨내는가 보다.
제일 먼저 눈뜨는 이곳은
별을 닮은 사람들이 사는 동네
고마리꽃이 옹기종기 모여, 한 생을 건너가는 중이다.
-「고마리꽃」 전문
시는 지붕 낮은 집들이 모여 있는 동네, 전설 같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마을 풍경이 풍경만으로 아름답다. 전라도 승주 언저리 ‘읍성(邑城)’을 지나가거나 성곽에서 내려다본다면 그 얼마나 아기자기할 것인가 상상해 볼 만하다. 먼저 떠난 이를 위해 창을 열어둔다거나 오래된 초가에 널빤지 소리내는 곳에서 작은 언덕 같은 산을 오른다고 치자. 그 자들은 다 성자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길가 어느 집 평상을 끌어내놓고 느닷없이 성당 종소리 뜯는다는 것은 좀 오버하는 것일 수 있다. 그러나 시는 이 동네를 “별을 닮은 사람들이 사는 동네”라 하여 “고마리 꽃이 옹기종기 모여 한 생을 건너가는 중”이라 하는 지적이 격에 어울린다. 알맞은 서정, 다감한 풍속, 아니면 한 작은 민속촌의 막걸리 한 사발에 정을 나누는 격이 격에 어울린다.
다음 서정을 보탠다.
“언덕의 라일락은
아무런 거부없이 봄의 의자가 되어준다
라일락을 마주친 사람들
숨을 멈추고
꽃잎에 입을 맞추듯 들여다본다 오래 헤어졌다 만난 연인처럼”이나
“겨울을 건너온 사람들
발은 거칠어져 있었다 고비사막을 가로질러온 낙타의 발바닥이다
모래바람을 가르고 걸어온
낙타의 발을
꽃잎이 스르륵 날아와 감싸준다”
-「라일락 의자」
같은 식물 천연성 이미지가 시인에게 남아 있다는 점에 오히려 놀라운 일이다. 이것들은 시의 본질에 속하기 때문이다.
4. 디저트와 우주관념
요즘은 시인들이 우주관념에 연대해 있는 것이 매우 자연스럽다. 박우담의 ‘별사탕’이나 손국복의 ‘보이저 통신’ 등에서 예사로이 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풀밭에 누워
시링크스를 생각하네
별똥별이
떨어지자
한 아이가 낙타를 타고
은하수를 건너가네
인용시는 박우담의 「초원의 별」이다. 상상이 천체 우주적이다. 이진주의 「디저트」를 들여다보자.
붉은 지구가 빨간 띠로 풀린다
과도가 가는 길엔
하얀 빛줄기 유성이 되어 곡선을 긋는다
반경을 튀어 나가려는 지구
빙글빙글 돌린다
꽃진 자리에
이 깜찍한 열매가 자라기까지
따가운 빛이 들어와 붉은 우주로 자란다
어린 순은 씨방을 키우고 속살을 찌운다
주먹을 휘두르는 폭풍우
꿍꿍 밀어내며 둥글어진다
사는 게
여름밤 은하를 건너듯 황홀한 것만은 아니지
헛디딘 발이
유성처럼 포물선을 그리며 떨어진다
떨어지는 순간에도 바닥을 치고 일어서야 한다
와삭, 사과의 단단한 속살을 깨문다
소박한 디저트
둥글게 모여 앉은 우리의 시간
지구본을 탐구하듯
빙그르르 사과를 돌린다
-「디저트」
후식으로 먹을 사과를 깎는 모습이 떠오른다. 사과를 붉은 지구로, 깎아서 떨어지는 껍질이 유성으로, 따가운 빛이 붉은 우주로, 헛디딘 발이 유성의 포물선으로, 우리들 시간이 지구본 탐구로 이미지화 된다. 이렇게 후식으로 먹는 사과를 두고 천체 이미지로 올려놓는다. 이는 초원의 별을 대상으로 천체 이미지로 번져가는 상상을 보여주는 박우담 시인의 시상 전개와 다르지 않다.
5.‘허공도시’와 문명비판
이진주의 시는 1930년대 김기림 등의 모더니즘에 접맥되고 진주의 동키호테(이경순 시인의 호 東騎에서 유래됨) 이경순의 아나키즘(무정부주의)에 부분적으로 겹쳐진다. 1930년대 모더니즘은 기상대, 기계문명 등에 대한 비판적 관점이 있었다. 그런데 이진주는 어떤가.
잘 오르는
비법을 찾을 수 있을까
허공을 걷으며 오르는 빌딩
꼭지점을 찾는 길이 고독하여 아슬하다
공중누각에 선 사람들
바람에 몰려 구름떼가 된다
내려다본 도시
허공이 뿌린고요에 납작 엎드렸다
한 칸 상자 안에 몸을 담은 사람들
희망지수를 높이는 일은 상자를 넓히는 것
절벽을 오르듯 아찔하게 온몸을 던지며 살아간다
꼭지점을 오르는 스카이 빌딩
쭉 쭉 허공을 뚫고 솟는다
온 힘을 쏟아내는 도시, 통점을 잊는다
뜬 사람들은
구름처럼 몰려다니는 걸 좋아하지, 층층이 흔들리며
잠시
떠나온 욕망의 도시를 잊은 채
-「허공 도시」 전문
이진주가 모더니즘에 연결되는 부분은 아스라이 높아지는 빌딩, 신역세권의 마천루와 그 감당할 수 없는 쭉 쭉 뻗고 오르고 또 오르는 신공법과 능력 이상의 개발의지 등에서 맞닥뜨리는 인간 꿈이 허공에 붙들려 있는 현실이 아닐까싶다.
우리나라 시 중에서 이진주는 저 서울의 개발붐을 타고 초기 산업화의 도시공학의 허공이랄까, 그 무모함을 일찍이 김광섭의 「성북동 비둘기」에서 빼앗기는 공간 개념으로 깨닫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 공간이 저 멀리 서울 미개척지 강북이 아니고 서부경남의 미개발지 진주, 초전동이나 충무공동 언저리에서도 저 모래도시 두바이가 이룬 꿈 같은 높이와 지리산 두께의 아직은 둔탁한 빌딩의 키재기가 시작되었음을 조석으로 실감하고 있었을 듯싶다. 그것도 주부로서 실감하고 있었을 것이다.
공중누각, 구름떼, 한 칸 상자, 희망지수, 온몸 던지기, 스카이 빌딩, 뚫고 솟는 층층 등이 과거 모더니즘의 언어로는 불감당 현실이다. 그러나 이진주 시인은 ”떠나온 욕망의 도시를 잊은 채“ 허공을 하공으로 바라보고 있다. 통점이 이제 생기다가 스스로의 환상에 걸려 통점이 마비된다는 것이 새로운 시인의 모더니즘이다.
그러나 그의 시에는 이미 기억에 사라지려 하는 「고마리꽃」이 가지는 여유로운 동네, 별을 닮은 사람들이 존재하고 있다.
6, 아직도 「슬픈 각도」가 슬픈
이번 작품은 시인이 접근한 시대 역사로 이어지는 상황 시다. 아직도 슬픈 각도로 기울어지고 있다.
하늘은 몇 날 며칠 붉은 피를 뿌린다
회오리 속으로
휘감아 오르는 파도의 각을 움켜쥐는 사람들
남은 손가락으로
마지막 메시지를 두드린다
검은 바다는 선미를 거머쥐고 놓지 않는다
객선은 하현달의 각도로 스러지고
해안선 비탈에 선
어린 동백 모가지가 툭 툭 나뒹굴기 시작했다
항구의 모퉁이에 앉은
그는
걸린 덩이를 뱉지 못해 꾸역거린다
차오르는 불을 식히러 연신, 오열을 토해내고 있다
살을 헤집고 나온
그의
피톨들이 바다로 침몰 중이다
-「슬픈 각도」 전문
지나간 상황은 인터넷에서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2014년 4월 16일 안산 단원고 학생 325명을 포함해 476명의 승객을 태우고 인천을 출발해 제주도로 향하던 세월호가 전남 진도군 앞바다에서 침몰, 304명이 사망한 사건, 구조를 위해 해경이 도착했을 때 ‘가만히 있어라’고 방송을 했던 선원들이 승객들을 버리고 가장 먼저 탈출했다. 배가 침몰한 이후 구조자는 단 1명도 없었다.”
(다음네트 백과 「세월호 참사」 참조)
이 부분을 더 읽어내기가 힘들다, 국민들은 그 순간 시시각각 현장을 뉴스로 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인용 시는 현장의 상황을 거의 그대로 이미지화했지만 마지막 두 개의 연은 이를 지켜보는 사람들 중에서 ‘항구의 모퉁이’에서 자리 잡고 앉아 오열하고 따라서 침몰한다는 가상의 인물 ‘그’(국민)를 설정하고 이미지화 했다는 점이 작품 구도이다. 제목의 ‘슬픈 각도’가 정직한 각도이고 슬픔을 환기하는 각도이다. 읽고 또 앍으면 당시의 현장이 거듭 거듭 실황으로 가슴에 새겨진다. 잘 쓴 시임이 분명하다. 이 한 편은 역사이고 시대고이고 울분이요 서러운 민족임을 자인케 해준다.
이진주 시인, 그는 이 한 권의 시집으로 노력과 자기 목소리 다듬기와 시인됨의 의무를 다하고자 한 것이 아닐까 싶다. 누구든지 조용한 시간, 라일락 핀 언덕에서 이 시집을 꺼내 읽어보는 기회를 가졌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