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시간이 지나고
이미 멀리 와 버렸다 해도
‘동경하는 길에 대한 마음’은
결코 사라지거나 줄어드는 것이 아니었다”
‘여정’이 책과 글을 좋아하는 마음을 고백한 순간, 뜻밖에도 네비게이션에는 ‘법조인’이라는 목적지가 설정된다. 의외의 경로에서 계속 벗어나지 못하고, 변호사가 되기까지 ‘여정’은 제법 녹록지 않은 시간을 보낸다. 법과대학(신림) - 사법연수원(일산) - 로펌(종로)의 ‘Single Room’에서 홀로 통과해 온 청춘의 시간들은, ‘여정’이 좋아하던 책과 영화, 드라마의 이야기에 기대어 이따금 색채를 얻게 된다. 붙고 떨어짐의 시기를 지나 다시 끝없는 경쟁에 돌입하고, ‘눈싸움’의 현장에 닿기까지 1990’s - 2010’s의 기억들이,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에서 ‘해피 아워’에 이르는 이야기들과 함께 눈덩이처럼 행간을 누빈다. 그 사이사이에 자리한 연이은 상실의 조각들도 한데 포개어져, 사각사각- 지면 위를 구른다.
칸막이 책상처럼 삼면이 모두 가로막혀 있는 듯한 현실에서 스물두 살의 ‘여정’은 ‘언젠가 글을 쓰게 된다면...’ 하고, 막연한 미래를 생각하며 ‘글 문(文)’자로 시작하는 이름을 만들어 둔다. 그리고 모든 시험을 마치고 변호사의 일상에 몸을 맞추어 가고 있을 무렵, ‘여정’은 여전히 남아 있는, 마음속 눈덩이를 감지하게 된다.
나는 자연스레 SATC(’Sex and the City’) 주인공들 중 미란다에게 가장 가까이 다가가게 되었다. (...) 캐리에게 무슨 일이 생기는 때마다 ‘I’m her lawyer’ 이라고 분명하게 말하는 변호사 미란다에게. 그런데 이상하게도 먼 곳을 응시하는 눈으로 노트북 자판을 두들기고, 본인을 소개할 때마다 가슴에 손을 얹고는 눈을 감으며 ‘I’m a writer’ 이라고 말하는 캐리에게 자꾸만 마음이 기울었다. 스스로가 자랑스러우면서도 흡족해 보이는 저 표정은 무엇인지, 노트북 화면 너머 지그시 향하는 먼 시선은 어떤 것일지 문득문득 마음이 쓰였다. S가 아닌 N의 표정으로 나를 소개하고 현실을 영위해 나가는 삶은 과연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지. (’The Next Episode’ 중에서)
드디어 낭독회 날이 다가왔을 때 나는 저녁도 거르고 버선발로 횡단보도를 지나, 눈앞이 환해지는 무대를 내내 바라보았다. 그곳에서 차분하고도 명징한 목소리를 듣고, 서로 몸을 기울여 이야기를 경청하는 모습을 보면서 무심코 생각했다. 반짝이는 눈으로 조근조근 단어를 고르고 상대의 침묵에도 가만히 행간을 헤아리는 이들 편에 서고 싶다고. 내가 저편으로 넘어갈 수만 있다면. (‘Single Room No. JSS : 가지 않기로 한 길을 바라보며’ 중에서)
동경하는 길을 바라보는 마음과
주어진 길을 좋아하려 애쓰는 마음,
그 사이에서 좌우로 흔들리던 청춘의 날들
사람들은 용기라 말하지만, 실은 ‘눈덩이’에 대한 이야기를 굴려 가면서, 늘 강 건너 저 편을 향하던 각도에서 바라보게 된 것은 이번에도 ‘좋아하는 마음’이었다. 머뭇거리며 서성이던 동경의 마음과. 비록 주어진 길일지라도 조금씩 정을 붙여가며 나름대로 좋아해보려 애쓰던 마음. 그 사이에서 좌우로 흔들리던 날들을 ‘청춘’의 시간이라 되돌아보며, ‘여정’은 누군가의 오랜 머뭇거림과 힘겨운 턴이 당신의 일상에 작은 이완이 되기를 소망한다. 부디 당신은 이렇게 긴 시간을 돌아가지 않기를 바라면서.
『눈싸움을 그치고, 눈사람을 만드는 이야기』의 A면(Side A)에는 ‘여정’이 좋아하는 작품들 외에도, 『비로소 나의 여정』을 떠났었던 ‘여정’의 첫 홀로 여행과 첫 자취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그러고 보면 청춘의 날들은 거의 모든 것이 ‘처음’으로 이루어져 있으므로, 그 밖의 많은 ‘첫’ 이야기들과 함께 ‘여정’이 처음으로 시도해 본 그림들을 즐겨 주시기를 바라며. ‘사랑하는 나의 눈사람을 당신께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