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창했던 조선 숲이 황폐화된 것은
왕실과 백성을 구분 짓는 차별적 산림정책에서 비롯됐다
산림 황폐화에도 왕족의 의례용 임산물만은
차질 없이 조달해온 조선의 산림정책
이 책은 우리에게 다소 생소한 황장(소나무), 율목(밤나무), 향탄(숯) 같은 조선 왕실의 중요한 의례용 임산물에 초점을 맞춰 울창했던 조선 숲이 어떻게 황폐화되었는지를 역사적 사실 자료에 기반해 낱낱이 조명한다.
삼국시대와 고려시대에는 시신을 화장해서 유골을 사찰에 안치하는 불교식 장례의식이 성행했던 데 반해, 조선은 건국 초부터 성리학적 통치 이념에 따라 국가를 운영했고 『주자가례』의 매장식 장례 방식에 따라 소나무로 된 관이 왕실 장례의 필수품이 되었다. 그에 따라 백성들 사이에서도 소나무 관으로 장례를 치르는 것이 육친에 대한 효도의 완성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조선 조정은 왕실 장례에 필요한 의례용 임산물 조달에는 헌신을 다한 것과 달리, 일반 백성이 장례에 사용하는 소나무 관재는 물론이고 일상에서 사용하는 목재와 땔감의 수급에도 별다른 대책을 내놓지 못했다. 그 때문에 산림 황폐화가 본격화된 18세기에 이르면 관재 값이 4~5배나 급등하고, 백성들이 가장 저렴한 관 1부(部)를 사려면 밭 600평(4마지기)을 살 수 있는 금액인 50냥을 지불해야 했다. 하지만 왕실의 상황은 달랐다.
산림 황폐화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조선 조정이었지만, 왕족의 관곽재로 사용될 황장목만은 조선 말까지 차질 없이 조달했다. 조선 말 엄혹한 시기에 제작된 황장목 관 2부(部) 가운데 1부는 이방자 여사의 1989년 장례에 사용되었고, 다른 1부는 2005년 그의 아들 이구(李玖)의 장례를 위해 남겨두기까지 하였으니 말이다. _5쪽
대체 왜 조선 조정은 왕족의 관재 조달에 활용한 방법을 백성들을 위해서는 활용하지 못했을까? 심지어 산림 황폐가 심화한 조선 후기에도 왕실의 의례용 임산물을 조달하고자 다양한 방법을 강구했음에도 국가 재정과 안보에 필수 불가결한 조선재는 왜 제대로 조달하지 못했을까?
이 책은 조선 조정이 임산물 조달에 있어 백성을 위해서는 무능했지만 왕실을 위해서는 유능했던, 그 차별적 산림정책이 조선 후기에 발생한 산림 황폐화에 어떻게 영향을 미쳐왔는지 면밀하게 밝혀낸다.
차별적 산림정책과 함께 간과할 수 없는
부실한 조선의 톱 제작 기술
이 책에서 눈여겨봐야 특이점을 하나 더 꼽자면, 차별적인 산림정책의 시행과 함께 조선의 톱 제작 기술이 발달하지 못한 점을 조선 산림의 황폐 원인으로 제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제재용 톱 제작 기술이 없었으며, 부실한 톱이 목재 생산과 유통에 영향을 끼쳐 관재 값의 폭등을 불러왔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이 내용은 그동안 학계에서도 논의된 바가 없기에 자칫 도발적인 주장으로 비칠 수도 있다. 하지만 30년 넘게 산림학 분야에 천착해온 연구자답게 임산물 이용에 있어 목공 도구의 역할과 그 중요성을 폭넓게 조망했다. 아울러 조선과 일본의 사례를 통해 근대 톱의 제작 기술이 목재 수요와 이용 측면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도 함께 살폈다.
목재 생산과 유통과 소비 체계가 구축된 일본과 달리 조선은 약탈적 임업으로 목재 생산을 지속적으로 꾀할 수 없었고, 지방의 장시에서 거래되는 목재의 종류도 송판으로 한정되어 있었다. 제재용 톱이 부실한 까닭에 판목을 다듬어 6~9cm 두께의 송판을 켜는 데는 많은 노동력이 필요했고, 그렇기에 관 값은 비쌀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지방에서 제재 톱의 수요도 많지 않았을 것이다. _117쪽
저자는 조선에서 근대 톱 제작 기술이 부실할 수밖에 없는 배경으로 1) 목재 축조가 아닌 온돌 난방을 채택한 건축 양식 2) 도시화 비율에 따른 낮은 목재 수요 3) 수급이 원활하지 못한 목재 유통 4) 미비한 상업자본 축적 등을 살피면서, 소나무 자원의 고갈과 함께 산림이 황폐된 원인을 종합적이고 입체적으로 진단했다.
이 책의 구성
1장에서는 소나무가 조선시대 왕실은 물론이고 일반 백성의 관재로 자리 잡게 된 긴 여정을 살핀다. 이와 함께 관재를 조달하는 과정에서 생겨나는 폐단들과 이를 막기 위한 조선 조정의 노력, 그럼에도 소나무 관재가 산림 황폐에 끼친 영향들을 차례로 살펴본다.
2장에서는 조선 후기 관의 가격이 400~500냥에 달한 이유가 산림 황폐로 인한 소나무 자원의 고갈과 함께 조선에서 제재용 톱을 생산(개량)하지 못한 점도 간과할 수 없음을 주장하기 위해서 조선과 일본 사례를 비교하며 제재용 잉거톱 제작 여부를 살펴본다.
3장에서는 조선 조정이 왕실 제례 품목 가운데 하나인 위패(위판)를 만들기 위해 밤나무 목재를 국용주재로 지정하면서, 밤나무를 어떻게 확보하고 조달했는지를 살핀다. 그 과정에서 18세기에 심화한 임산자원 고갈에 대처하고자 호남과 영남의 사찰림들을 활용한 배경 등을 고찰한다.
마지막 4장에서는 조선시대 성리학적 통치행위에 있어서 왕족의 유택인 능·원·묘에 쓸 숯과 제향(祭享) 경비를 안정적으로 조달하기 위해 왕, 후궁, 왕자 등에게 배정된 향탄산을 살펴본다. 하지만 늘어나는 능침의 수요를 감당하기가 어려워지자 한양 인근이 아닌 강원도와 전라도, 경상도까지 향탄산을 배정하면서 날로 심화되는 산림 황폐화에 백성들까지 곤궁해지는 상황이 이어지고, 이를 위해 각 지역의 사찰들이 적극적으로 앞장서서 향탄봉산을 관리한 사실을 하나하나 확인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