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그림만은 꼭 알아야 하는 이유에 대한 사려 깊은 통찰
한 권의 책으로 정리하는 그림의 역사
『오직, 그림』에는 시대와 화풍을 아우르는 작품들이 실려 있다. 1세기경 로마에서 제작된 프레스코화부터 시작해 르네상스, 바로크와 로코코를 거쳐 사진의 등장 이후 회화를 혁신한 인상주의, 입체파, 추상표현주의 등의 사조가 이어진다. 각 시기를 대표하는 그림들을 역사순으로 따라가다 보면 회화의 변화 양상이 한눈에 들어온다.
르네상스 이후 화가들은 실제 모습과 유사한 이미지의 재현을 목표로 한다. 한 인간의 얼굴을 고스란히 포착한 벨라스케스의 〈교황 이노센트 10세의 초상화〉(1650)와 시대의 풍속을 보여준 장 앙투안 바토의 〈제르생의 간판〉(1721)이 그 사례다. 그러나 1839년 사진이 발명되면서 대상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는 것의 의미가 사라진다. 이후 반 고흐의 〈아를에서 그린 자화상〉(1888), 에드바르 뭉크의 〈붉은 집〉(1890)처럼 실재하는 대상을 감정이라는 프리즘에 통과시켜 표현한 작품들이 등장한다. 세잔과 피카소는 하나의 화면에 여러 관점을 종합하기 시작한다. 사진의 등장 이후 재현에서 표현으로, 구상에서 추상으로 변화하던 회화는 마크 로스코의 색면추상 작품 〈무제〉(1964)에서 방점을 찍는다.
이 책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간다. 프랜시스 베이컨, 데이비드 호크니처럼 추상화라는 회화사의 흐름에 저항하면서 새로운 형식의 구상화를 시도한 작가들을 소개한다. 키키 스미스, 안젤름 키퍼처럼 회화작품 안에 신화적인 형상을 개입시키는 작가들도 이야기한다. 『오직, 그림』이 전하는 서양미술사는 과거에서 미래로 나아가는 선형적인 역사가 아니라 과거와 현재가 끊임없이 대화를 주고받는 원형적인 역사다. 박영택 저자는 그 대화를 귀담아 들은 뒤 독자들에게 전달한다.
회화란 단순하게 말해 평면에 환영을 주는 장치다. 회화의 개념은 매 시기마다 조금씩 다르게 해석되고 당대의 테크놀로지와 이미지 사이의 관계 속에서 새로운 삶을 부여받는다.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을 거치면서 회화는 사실상 무력해졌다. 구상과 추상회화란 이미 과거의 것이 되었다. 그러나 회화는 죽지 않고 매번 새롭게, 다르게 출현해서 다시 살아날, 그리고 죽어갈 기회를 엿본다.
_417쪽
오래 그리고 깊이 바라보는 시선으로
우리가 그림을 사랑하는 이유를 증명하다
박영택 저자는 한 그림을 오래 관찰한다. 구석에 있는 작은 붓 터치 하나조차 놓치지 않는 끈기와 세심함으로 그림의 이면을 밝혀낸다. 『오직, 그림』은 긴 시간을 들여 바라봤을 때에만 감지할 수 있는 작품의 속삭임이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조토의 프레스코화 〈애도〉(1304~1306)에서는 그림의 구도와 인물들의 배치를 살피면서 예수의 시신을 둘러싼 인물들의 이야기를 끌어낸다. 마네의 작품 〈폴리베르제르의 술집〉(1882)에서는 그림 우측에 배치된 두 인물의 미묘한 형상을 통해서 그림의 의미를 확장한다. 조르조 모란디의 〈정물〉(1954)에서는 고요한 사물들 틈에서 미묘한 어긋남을 발견하고, 루치안 프로이트의 〈푸른색 발톱을 가진 플로라〉(2000~2001)에서는 그림 하단에 그려진 그림자를 통해 성적인 뉘앙스를 포착한다.
훌륭한 그림이란 말을 거는 그림일 것이다. 그림은 분명 우리에게 어떤 말을 하고 있으며, 그림의 소리를 들을 수 있을 때 그 그림은 진정 살아 있는 그림이 된다.
_159쪽
르네상스 때까지만 해도 회화작품은 성당이나 왕궁에 가야만 볼 수 있는 귀한 것이었다. 그러다 캔버스가 발명되고 복제품이 퍼지면서 어디에서나 쉽게 볼 수 있는 것이 되었고, 회화가 지니던 신비로움은 옅어졌다. 『오직, 그림』은 이차원 평면 위에 물감이 얹어졌을 때 삼차원의 구체적 대상 혹은 추상적인 감정이 살아나는 회화의 마법 같은 매력을 복원한다. 박영택 저자의 풍부한 회화 컬렉션은 독자들에게 왜 자신이 그림을 사랑하는지 생각해볼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