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작가들의 예술세계를 겹쳐 읽을 때 비로소 드러나는 다층적 초상
마치 사전처럼 원하는 작가에 대한 내용을 추려 읽을 수도 있겠지만, 이 책의 진가는 각각의 원고를 포개어 읽을 때 더더욱 드러난다. 한국 근현대 미술계의 주류적 흐름(가령 1960년대의 앵포르멜, 1970년대의 단색화 운동, 1980년대의 민중미술 등) 속에 놓인 여성 작가들은 때로는 주류와 유사한 결로, 때로는 주류에 빗겨 서며 각자 자신의 자리를 모색한다. 또한 표현그룹(1971), 한국여류화가협회(1973), 한국여류조각가회(1974), 서울프린트클럽(1980), 시월모임(1985), 여성미술연구회(1988) 등의 모임을 결성하여 여성 작가들이 활동할 수 있는 장(場)을 만들어가는 흐름도 병행된다. 여성 작가들의 대응은 각각 편차를 보이는데, 그 다양한 양상을 섬세하게 견주며 지도 그리기(mapping)를 해본다면 이 책을 매우 흥미롭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많은 여성 작가들이 ‘세계화’가 시대적 화두가 되기 훨씬 전부터 세계라는 좌표를 염두에 두고 자신의 위치를 모색한, 글로벌한 시야를 갖춘 이들이었던 점도 눈에 들어온다. 시각 장르로서 문자보다 훨씬 직관적인 미술 분야의 특성 또한 세계화를 빠르게 견인한 동력 중 하나였을 터. 이들 중 상당수는 이른 시기부터 일본을 비롯해 유럽과 미국으로 유학하여 타국의 공기를 흡입하고 자신의 예술적 자양분으로 삼은 바 있다. 그러나 유학의 경험이 없거나 동양의 전통에 뿌리를 둔 작업을 한 작가들에게서도 폭넓은 시야와 이에 기반한 고민이 엿보이는데, 이는 상당수의 여성 작가들이 시대의 전위에 있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한편 ‘여성’이라는 특징을 화두 삼아 작가들의 예술세계를 겹쳐 읽는 독법을 쓸 때 포착되는 여성‘들’의 같고도 다른 다층적인 결 역시 눈여겨볼 지점이다. 예를 들어 근대기부터 1970년대 이전까지 활동한 상당수의 여성 작가들에게는 10여 년 안팎의 ‘공백기’가 따라붙는다. 이른바 결혼, 출산, 육아, 내조의 시기다. 당대 사회의 구조적 억압이 빚어낸 현실일 텐데, 요즘 말로 하면 이들은 집단적으로 ‘경력 단절 여성’ 시기를 거쳐온 셈이다.
그렇다고 해서 가정을 이루고 살아간 시기에 대한 작가들의 태도가 동일한 것은 아니다. 가령 아이 같은 시적인 그림으로 대중의 사랑을 받았던 김점선 작가의 경우, 큰 체구와 중성적인 외모 때문에 사람들 속에 동화되지 못하다가 결혼과 출산 이후 ‘평범한 아줌마’로 살게 되면서 비로소 일종의 안도감을 느꼈다고 한다. 이는 여성적이지 않는 외모에 대한 사회적 압력이 작가에게 훨씬 크게 다가왔다는 뜻으로, 모두가 여성일지라도 개별 여성이 느끼는 억압은 차이가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일 것이다. 인류의 절반이면서도 소수자인 여성으로서의 특징을 검토할 때 당대적 보편성을 읽어내면서도 동시에 정형화된 논리를 넘어서는 다양한 접근으로 개개인의 선택을 규명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러한 접근을 해볼 수 있는 일차 자료로서 이번 책은 손색이 없으리라고 본다.
책을 읽다 보면 선도적인 작업을 선보였건만 ‘광녀(狂女)’라는 말까지 따라붙은 정강자 작가의 에피소드에서 짙은 페이소스를 느끼다가, ‘미친년들’이라는 말을 작품 제목으로 내세운 뒤 여성에게 가해지는 부조리의 정곡을 찌르는 박영숙 작가의 시니컬한 결기도 만나게 될 것이다. 여성으로서의 고민을 작업으로 표현하지 않으면서 혹은 페미니스트로 자신을 정체화하지 않으면서 세상의 다양한 화두를 붙잡아 자신의 작품 세계를 펼친 여성 작가들의 모습 또한 마주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여성 예술가의 다중적 초상이야말로 이들이 미술계에서 성취해낸 작업과 함께 여성사가 탐색해야 할 풍요롭고 깊은 장일 것이다.
20세기 한국 여성 작가들이 선보인 다채롭고 풍요로운 예술세계
이번에는 본격적으로 이 책의 내용을 살펴보자. 두 권으로 구성된 이 책은 총 10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1장에서는 근대기 미술에서 주목할 만한 선구자들을 수록했다. 동·서양화뿐 아니라 디자인, 미술교육까지 아우르면서 우리 미술의 근대화를 이끈 작가들로, 조선미술전람회(조선미전)나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에서 수상할 때마다 ‘최초의 여성’이라는 말이 따라붙던 이들이다. 대개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이라는 큰 굴곡을 거친 이들로, 해외에서 유학한 이들도 있지만 국내에 처음 생긴 미술대학을 통해 미술계에 입문한 이들도 눈에 띈다.
2장에서는 그 후속 세대로 1950년대 중반 이후 미술계에 안착한 작가들을 다루었다. 이들은 회화와 그 한 부류인 태피스트리(tapestry), 그리고 조각에서 전 세계적인 모더니즘 조류에 부응하는 방향으로 작업했다. 전통적으로 여성의 영역으로 간주되던 섬유예술을 현대적으로 개척한 이신자와 성옥희의 작업, 반면에 남성적 영역으로 간주되던 조각 분야에 입문하여 자신의 목소리를 낸 나희균, 김정숙 등의 작업이 대비되어 눈에 들어온다. 전반적으로 모더니즘의 기조 아래에서 형태의 추상화(抽象化)를 시도한 점이 주목되는데, 이는 3장에 수록된 후속 세대 추상 화가들에게 계승되었다. 3장에서 살펴본 작가들은 1960년대의 앵포르멜, 1970년대의 단색화 운동에 참여한 이들로, 주류 경향에 합류하면서도 자신만의 독특한 조형 어법을 구사했다. ‘추상회화’라는 개념으로 수렴되지만, 이들의 작품 세계가 매우 다채로운 것은 도판을 살펴보면 쉽게 확인될 것이다.
4장은 한국화라는 전통적인 장르가 어떻게 동시대와 만날 수 있는지를 모색했던 작가들을 모았다. 우리의 것을 이어가면서 동시에 시대의 조류에 부응하는 지점을 고민하는 작업은 그야말로 치열한 실험을 동반할 수밖에 없었다. 과거의 것들 중 계승할 것을 가려내면서 현대성을 표출할 수 있는 것을 더해나간 이들의 작업은 경계를 넘나드는 유연함을 바탕으로 개척해낸 새로운 세계였다. 한편 5장에서는 선구적 조각가들의 뒤를 이어 형식과 재료 실험을 통해 조각의 영역을 넓힌 후속 세대 조각가들을 다루었다. 이들의 작업이 1980년대 이후에 집중된 것은 조각에서의 여성 진출이 상대적으로 어려웠던 점을 반증한다. 초기에 비해 이후의 작업은 같은 조각일지라도 기획과 소재, 표현 방식이 다양해져서 작품의 스펙트럼이 매우 넓어진다.
6장에서 다룬 작가들은 1980년대 들어서면서 한국에 포스트모던 기류가 형성되고 그 한 국면인 페미니즘이 수면 위로 떠오르면서 ‘여성과 여성성’을 화두로 삼은 이들이다. 본격적으로 페미니즘 미술의 문을 연 작가들인데, 시월모임이나 여성미술연구회 등을 통해 목소리를 냈던 이들도 눈에 띈다. 물론 이 자장의 바깥 혹은 너머에 있던 이들도 있으며, 이들은 도전적인 작품을 통해 사회적 이슈가 되는 예술을 선보였다.
이 시기에는 모더니즘의 맹아인 추상 형식을 벗어나려는 움직임 또한 부상하는데, 7장의 형상 회화 작가들, 8장의 추상과 구상의 경계를 넘나든 작가들의 작업이 그 예다. 기존 틀에 한정되지 않으면서 자신의 화두와 방법론을 고안해내고 이를 개척한 점이 돋보이는, 그리하여 개개인이 넓힌 지평을 섬세하게 살펴봐야 할 작가군이다.
이어 9장에서는 몸과 그 감각을 전면에 드러냄으로써 추상미술의 근간인 이른바 ‘정신주의’를 벗어나고자 한 예들을, 10장에서는 설치, 사진, 비디오 등 새로운 매체를 통해 기존의 장르 구분을 넘어서고자 한 예들을 모았다. 이들 작가들은 철학, 문화인류학, 탈식민주의 등 다양한 이론을 바탕으로 작품을 제작하기도 했으며, 이 시기에 들어서면 페미니즘은 여성의 현실을 탐색하는 방법론을 넘어서서 세계 자체를 해명하는 데 필요한 이론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