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손가락에 끼어 있는 비취가락지
-청초淸楚, 젊음, 봄, 희망
김정빈(소설가, 시인)
1
수필은 청자연적靑瓷硯滴이다. 수필은 난蘭이요, 학鶴이요, 청초하고 몸맵시 난렵한 여인이다. 수필은 그 여인이 걸어가는 숲속으로 난 평탄하고 고요한 길이다.
-피천득, 「수필」
별과 사막, 사막 속의 우물, 장미와 왕자.
생텍쥐페리는 『어린 왕자』에서 이것들에 영원한 신비를 부여하여 후대의 동화 작가들을 절망시켰거니와 선생은 이 문장으로써 수필을 비유할 만한 격조있는 이미지들을 다 사용함으로써 후대의 수필가들을 절망에 빠뜨려버렸다.
붓, 벼루, 먹, 종이는 문방사우이거니와 이는 문학에서 시와 소설과 희곡일 것이다. 그러나 위대한 영웅도 거룩한 성자도 아닌 우리 범속한 이들의 삶은 문방사우 옆에 놓인 조촐한 연적 같은 것. 그래서 슬퍼해야 할까. 아니다, 삶은 큰길을 잠깐 벗어난 뒤안길에서 때로 순은처럼 빛나는 법, 수필가는 그 길을 걸으면서 청초한 여인을 만난다.
수필이라는 이름으로 발표되는 글은 일 년에만도 수천 편이 넘는다. 그러나 청자연적 같고, 난 같고, 학 같고, 몸맵시 난렵한 여인 같은 글은 얼마나 귀한가. 선비 정신과 서양 문학이 만나는 지점에서 쓰여진 이런 문장을 다시 만나기까지, 우리는 여러 백 년을 기다려야 할지도 모른다.
2
수필은 가로수 늘어진 페이브먼트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길은 깨끗하고 사람이 적게 다니는 주택가에 있다. 수필은 마음의 산책散策이다.
-피천득, 「수필」
금아 선생의 〈수필〉이라는 수필이 국어 교과서에 실린 다음부터 우리의 수필은 ‘진주빛, 혹은 비둘기빛’이 되어버렸다. 선생의 글이 너무나 훌륭한 나머지 다른 유類의 수필이 묻혀 버리게 된 것이다.
생각해 보면 수필의 특성은 ‘청자 연적’의 작고 아담함이나, ‘난’과 ‘학’의 품격만으로 제한되는 것은 아니다. ‘주택가에’ ‘깨끗’하게 단장된 ‘포도鋪道’만이 수필인 것도 아니고, ‘산책’처럼 ‘한가’한 것만이 수필도 아니다.
지사풍志士風의 강개慷慨한 글을 득의得意로 삼을 수 있음은 설의식의 〈헐려 짓는 광화문〉을 읽어보면 알 일이요, 감흥에 있어서는 똑같이 고조되어간다 하더라도 조지훈 선생의 〈무국어撫菊語〉는 비감悲感의 맛이 설의식의 그것과는 다르다.
그런 가운데 금아 선생의 수필은 단아하고 간결하며, ‘온아’하고 ‘우미’함으로써 독보적인 경지에 이르렀다. 그 맛, 그 멋을 다른 이가 어찌 흉내낼 수 있으랴. “글은 그 사람이다”라는 말이 있으니, 내가 아직도 금아 선생의 글을 멀리서 흠모만 할 뿐 다가가지 못하는 것은 아직 그분의 마음을 얻지 못한 까닭일 터이다. 문학적 기법의 숙달 이전에, 그분의 깨끗한 삶을 다 본받지 못한 까닭일 것이다.
3
오월은 금방 찬물로 세수를 한 스물한 살 청신한 얼굴이다.
하얀 손가락에 끼어 있는 비취 가락지다.
오월은 앵두와 어린 딸기의 달이요, 오월은 모란의 달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오월은 신록의 달이다. 전나무의 바늘잎도 연한 살결같이 보드랍다.
-피천득, 「오월」
가장 금아 선생다운 글맛은 청淸과 신新 사이에 있다. ‘청’은 맑고, ‘신’은 새롭다. 맑기에 새롭고, 새롭기에 맑은 오월. 그 오월이 가장 금아다운 간결하고 산뜻한 표현 속에 지금 여기에 와 있다.
지난 오월도 아니고 다가올 오월도 아닌, 지금 이 순간의 오월. 어언 이 글이 쓰여진 지도 50여 년이 되었고, 스물한 살 젊음을 말하던 선생 또한 구순九旬의 노옹老翁이 되었다. “머문 듯 가는 것이 세월인 것을.” 이렇듯 끝내 머물 수 없는 것이 세월이요 삶이런가. 다만 작가가 남긴 글만이 스물한 살 청신한 얼굴로 그가, 그리고 우리가 한때 젊었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4
봄은 새롭다. 아침같이 새롭다. 새해에는 거울을 들여다 볼 때나 사람을 바라다 볼 때 늘 웃는 낯을 하겠다.
-피천득, 「신춘」
“봄은 새롭다. 아침같이 새롭다.”
다섯 음절 두 낱말만으로 한 문장을 짓는다. 그 다음은 일곱 음절. 다섯과 일곱 음절에는 리듬이 있다. 예전 선비들이 읊던 오언五言, 칠언시七言詩의 음절 수가 다섯과 일곱인 것은 우연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간결만이 금아 수필의 글맛을 이루는 것은 아니다. 간결 뒤의 만연漫然, 비약飛躍에 뒤따르는 따뜻한 어루만짐. 부연敷衍없이 생략된 문장 사이로 봄 기운이 신선하게 스며들 때, 독자의 얼굴에는 삶에의 고운 긍정이 떠오른다.
남을 향한 긍정, 세상을 향한 이해. 그러나 나 자신도 빼놓지 말자. 우리는 엄숙한 도덕 군자이고만 싶은 게 아니니까. ‘거울을 바라다보며’ 자신을 향해 ‘웃는 낯을’ 하는 한 그에게 삶은 그래도 살 만한 것. 위선을 벗고 정직 앞에서 설 때 행복은 마음 가운데 봄을 잉태하는 법.
5
지금 생각해도 아까운 것은 20여 년 전 명월관에서 한때 제일 유명하던 기생이 따라 주던 술을 졸렬하게 안 먹은 것이요, 한번 어떤 친구가 자기 서재 장 안에 비장하여 두었던 술병을 열쇠로 열고 꺼내어 권하는 것을 못 받아먹은 일이다.
-피천득, 「술」
나 같았으면 이런 경우 핑계를 ‘졸렬’에 두지 않고 ‘몸’에 두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나는 결코 금아 선생 같은 명수필을 쓸 수 없다. 졸렬에는 겸허가 있지만, 몸에는 그것이 없기 때문이다.
선생이 기생과 친구의 술을 못 마셨던 것은 졸렬 때문은 아니고 실제로는 몸 때문이었을 것이다. 처음 선생을 뵈었을 때 선생은 한분순 시인과 나를 롯데 호텔 커피숍으로 데리고 가셨다. 그때 우리는 커피 석 잔을 시켰지만, 선생은 당신의 커피를 우리에게 반씩 따라 주셨다. 커피를 조금만 마셔도 잠을 못 주무신다는 거였다.
그런 체질로 술 앞에 어찌 ‘작아지지’ 않을 수 있으랴. 다만 그 작아짐을 유머의 소재로 삼는다는 점에서 나는 선생을 부러워한다. 나 또한 선생 못지 않게 술 앞에 ‘자꾸만 작아지는’ 체질을 갖고 있다. 문제는 내가 그걸 선생처럼 유머로 승화시키지 못한다는 점이다.
에필로그
인연, 작음, 아름다움. 피천득 선생의 인생을 구성하는 세 마디 말이다. 선생은 작지만 반짝이는 사건을 씨줄로 삼고, 곱고 연한 마음을 날줄로 삼아 인생이라는 천을 짠다. 그 베짜기가 인연이다. 그렇게 짜인 인연으로서의 인생은 ‘번쩍거리지 않은 바탕에 약간의 무늬가 있는’ ‘비단’이다. 진리를 전하는 오래된 책은 말한다, 인연은 그물 같은 것이라고. 그물의 한 매듭을 당기면 모든 매듭이 출렁이듯이 한 매듭으로서의 나는 남들과 서로 연분지어진 관계라고 그 책은 거듭 설명한다.
선생이 짓는 인연의 그물은 거미줄로 만들어진 그물이다. 선생과 맺어지는 인연들은 물고기 대신 아름다움을 건지는, 연하고 부드러운 거미줄 그물에 맺힌 맑은 이슬방울인 것이다. 금아 문학은 ‘작고’ ‘아름다운’ ‘인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