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위’로서의 예술의 육체성
또 하나, 알랭 예술론의 중요한 특징은 예술을 자연과의 관계라는 구도 하에 파악한다는 점이다. 예술에서의 자연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인데, 그중 인간의 몸을 예술에 있어 불가결하며 중요한 자연으로 파악한다. 『예술 강의 20』은 총론적인 논의 후에 각론으로 넘어가서 먼저 댄스를 다루고 그 다음에 음악을, 그 다음에 시를 주제로 하는데, 이상의 세 가지가 몸을 변화시키는 예술로 정의된다는 데에서 자연으로서의 몸의 중요성이 단적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자연으로서의 몸과 예술의 관련이라는 것도, 자연을 그냥 묵묵히 따른다기보다, 자연과 격투하고, 자연과 서로 다툰다고 하는 것이 크게 표면에 부각된다. 몸이 고양된 상태 그 자체만으로는 결코 형태화로는 다가갈 길이 없다. 그러기 위해서 그것은 통어되고 억제되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외침은 자신을 따르고, 자신에게 귀를 기울이며, 지속되어 가는 것이 되고, 음악적인 소리가 된다. 그와 같이 고양을 통어하거나 억제하는 행위를 ‘몸의 훈련’이라 부르고, ‘정념의 정화’라 부른다. 그렇게 몸을 조련하고 정념을 정화하는 것은 그것이 바로 예술 활동의 본래 모습이자 예술적 아름다움으로 이어질 수 있는 길이기 때문이다.
예술을 통해서 ‘행복’으로
시간 예술로서의 음악과 시, 공간 예술로서의 건축, 조각, 회화 등을 다룬 각론 뒤로, 마지막 장인 20강에서 알랭은 새삼 예술가가 무엇인지 묻고 예술가들을 고대 그리스의 무녀인 퓨티아에 빗댄다. 몸이 고양되는 것을 억제하고 혼탁해지는 정념을 정화하는 것이 예술이라고 알랭은 거듭해서 말하고 있지만, 무녀에 가까운 예술가는 그러면서도 몸의 고양과 정념의 혼탁을 각별히 강하게 받아들이는 존재여야 한다. 대자연과의 교감이 있고, 만들어지고 있는 작품과의 교감이 있고, 만들어가고 있는 자신의 몸과의 교감이 있다. 그것이 예술 제작의 현장의 상황인 것이며, 바로 거기에서 외적인 자연뿐 아니라 내적인 자연에도 신뢰를 두는 것이 예술가라고 할 수 있다. 그러한 한에서 그는 거의 유례가 없는 낙천가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20번의 강의를 통해 예술과 예술가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알랭은 역시 예술가를 행복한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 같다. 더구나 그 ‘행복’은 예술가만이 소유하는 것은 아니다. 작품을 통해 예술의 세계로 입문하려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것은 공유된다. 예술을 논하는 알랭 자신도 물론 그 행복에 기여하는 한 사람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