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에 알코올이 흘러넘치는
두 주정뱅이의 ‘문학적 씨부럴’
설재인, 이하진 작가는 삶에 술을 반려한다는 사실을 제외하면 모든 게 다르다. 오직 술을 좋아한다는 공통점만으로 두 사람의 편지가 시작된 것이다. 1부 ‘취중 마음 농도 0.05’에는 두 주정뱅이의 취향적 반목이 담겨 있다. 둘의 다름은 첫 만남에서부터 드러난다. 무려 한 잔에 5만 원씩 하는 위스키를 마시고 설재인 작가가 “향이 그냥 위스키네요”라고 답한 순간부터 말이다. 그는 대략 소주파로, 정확히는 주종을 가리지 않는 반면 이하진 작가는 위스키를 즐긴다. 음주 습관도 정반대다. 한 명은 피곤할 때 과음과 우울할 때 혼술을 금하지만 다른 한 명은 전혀 개의치 않는다.
이뿐만이 아니다. 두 주정뱅이의 차이는 1부 에피소드 곳곳에서 드러난다. ‘폭음의 변: ‘문학적-설재인’과 ‘씨부럴적-설재인’’ ‘행복한 일이 생기지 않을까?’에는 술을 먹기 시작한 각자 이유가, ‘생전 숫자를 가져본 적 없는 청년들을 향한 사랑’ ‘아메리칸 스타일’에는 음주에 얽힌 자신만의 추억이, ‘오 씨는 언제나 그곳에 있어요. 서글서글하게 웃으면서’ ‘얼음 넣은 맥주와 첫 잔이 정해진 무림 고수의 바’에는 상반된 단골집 이야기가 담겨 있다. 서로의 다름을 끊임없이 확인하는 두 사람의 편지는 끝내 하나의 질문을 향한다. ‘우리에게 술은 어떤 의미일까?’
제게 술은 문학적-설재인이 되지 못하는 씨부럴적-설재인이 문학적 씨부럴의 단계라도 성취하기 위해 주입해야만 하는 기름과 비슷합니다. 일단은 모든 원고를 술 마시면서 쓰기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술을 마시며 저를 수백 수천 개의 조각으로 쪼갠 후 하나하나의 인물로 키워내 제 머릿속을 채워야만 외롭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느 순간 외롭다는 이유로 사람을 찾게 된다면 저는 다시금 지난한 시행착오와 자기혐오의 시간을 견뎌내야만 할 테니까요. (39쪽, 설재인, 폭음의 변: ‘문학적-설재인’과 ‘씨부럴적-설재인’)
아무튼 제게 술은 그런 의미예요. 관계에 대한 욕망. 그게 클 것 같네요. 취해 풀어진다는 분위기에서 즐길 수 있는 친밀감이 있잖아요? 그게 마치 타인과의 우정 따위를 증명받고 확인받는 것 같아서 안심되고, 거기다 오고 가는 이야기도 재밌고요. 나와 기꺼이 시간을 보내주고 내어주겠다는 친밀감의 보증 같아서요.
저는 아직 잠잠하기만 한 메신저와 나 없이 진행되는 즐거운 자리들을 가만히 바라보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작가님께선 그것을 버티려 하는 것이 폭음의 변이라 하셨지만, 저는 외려 그 정적으로부터 오는 소외감을 어떻게든 깨보려고 술이라는 물건의 효용을 자꾸만 끌어오려 해요. 사람들은 저란 사람을 싫어할지 몰라도, 술은 좋아하잖아요? 그런 셈입니다. (51~53쪽, 이하진, 행복한 일이 생기지 않을까?)
설재인 작가에게 술은 이상과 현실 사이의 괴리를 회피하기 위한 도구다. 그는 ‘사람이 무서울 때, 사람이 만들어낸 상황이 자신의 이상으로 가는 길을 막으려 들 때 싸우지 않고 사람을 피해 숨는’다(34쪽). 외로워도 어쩔 수 없다. 사람이 옆에 있으면 포악해지는 자신을 견딜 수 없으니까. 이런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술을 마시며 글을 쓴다. 반대로 이하진 작가에게 술은 관계에 대한 욕망이다. 타인과 이어지기 위해 음주한다. 술로 인해 풀어지는 친밀한 분위기 속 취기를 빌려서라도 누군가에게 사랑받고 싶어 하는 마음에서. 자신을 타인에게서 고립시키기 위해 술을 선택한 사람과 타인과 연결되기 위해 술을 마시는 사람. 술을 반려하는 서로 다른 이유를 가진 그들을 보며 우린 묻게 된다. 우리에게 술은 무엇일까?
사람이 미치도록 좋고,
사람이 미치도록 싫습니다
2부 ‘취중 마음 농도 0.15’에서 두 작가의 편지는 술과 함께했던 것들로 확장된다. ‘술은 그 자체로 무언가를 남기기 힘들’고 ‘술과 함께하는 것들이 휘발하는 풍미에 불과한 에탄올 용액을, 음주라는 추억으로 남게 해준다’는(140쪽) 이하진 작가의 말처럼 우린 어쩌면 술 자체를 좋아하기보다 좋은 음주의 경험이 좋은 기억으로 남아 계속 술을 마시는 것일지도 모른다. ‘술과 함께하는 것들’ ‘마지막엔 꼭 구명정을 던져줄게’에는 술을 마시는 장소와 함께하는 사람에 관한, ‘안주의 감각’ ‘술과 안주가 맛있는 경험’에는 술 한잔에 딱인 안주 이야기가 펼쳐진다. 그들에겐 꽤 자주 지겹도록 지지고 볶는 사람 대신 소설 속 등장인물이 완벽한 술친구가, 책과 시는 훌륭한 안주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결국 ‘사람’으로 귀결되는 두 주정뱅이의 편지는 모두의 해피엔딩을 꿈꾸며 나아간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세상의 레이어를 상상하는 것입니다. 나의 존재를 어디선가 취기 어린 누군가로 빚어내고 있겠지요. 그는 그 세상에서도 매일 낮술을 마시는 여자처럼 조금은 이질적인 구성원일 것입니다. 그러나 저로 인해서 그 술을 외로운 게 아니라 기꺼운 것으로, 아니, 가장 충만한 순간으로 여길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마치 제가 그러하듯이요. (152쪽, 설재인, 마지막엔 꼭 구명정을 던져줄게)
모두가 자신의 삶을 주인공이라는 배역으로서 살아가다 감독의 슬레이트 치는 소리에 웃으며 끝을 마무리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 모든 슬픔이 그들만의 것이 아니었으면 좋겠습니다. (161쪽, 이하진, 그 모든 슬픔이 그들만의 것이 아니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삶 속 술이란 이름의
반려가 주는 의미
많은 사람들은 하루의 고단함과 삶의 피로를 잠시 잊기 위해 술을 마시곤 한다. 어떤 술을 어떤 안주와, 어떤 사람과 마시는지보다 때론 그저 술 한잔이 주는 ‘괜찮다’는 환각이 필요한 것이다. 3부 ‘취중 마음 농도 0.25’는 우리 삶과 술에 관한 더욱 내밀한 이야기를 모았다. ‘내가 우산꽂이였다는 사실도 가끔 잊을 수 있게 하는 환각’ ‘좋아서 머무는 이들의 필드를 생각합니다’ ‘우리를 ‘살아낼’ 수 있게 만드는 것’ ‘술 덕분에 술이라도 있어서’ 등 제목에서부터 녹진함 가득한 에피소드는 우리 삶의 괴로움을 잊기 위한 수단으로 술이 얼마나 가성비 넘치는 선택인지 잘 보여준다. 아무리 술이 백해무익하다지만 ‘오늘의 한잔이 작은 낙관을 조금이라도 길게 이어주는 다리가 될 수 있다면, 아무래도 괜찮은’(352쪽) 것이다.
약물로서의 술을 이야기했었습니다만, 그래도 중독이 된첫 계기는 결국 ‘좋아해서’겠죠. 결론적으로 아주 다른(다르다고 예상은 했지만 편지를 주고받으며 더욱 느꼈습니다. 정말 정말 다르더라고요) 저희가 뭉치게 되었던 이유는 ‘뭇사람들의 기준에 따른다면 백해무익하다고 여겨지는’ 대상, 그 대상에 몰두하는 모습 때문인 것 같아요. 평생 그런 종류의 일만 하면서도 살아낼 수 있을까요? (309~310쪽, 설재인, 좋아서 머무는 이들의 필드를 생각합니다)
어느 시점엔 자의와 상관없이 삶이 이어진다는 사실에 괴롭기도 했고, 아직 그걸 완전히 부정할 수는 없지만 그래서 술을 마시는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당장 살아있으면 된 거 아닐까요? 오늘의 한잔이 이 작은 낙관을 조금이라도 길게 이어주는 다리가 될 수 있다면, 아무래도 괜찮지 않을까 싶어요. (351~352쪽, 이하진, 대단하지 않아도 된다)
다르고도 다른 두 주정뱅이는 각자의 방식으로 ‘술에 몰두’하는 모습에서 ‘술을 좋아한’다는 공통점을 발견하고 서로를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었을지 모른다. 이는 술을 반려하는 모든 주정뱅이들의 염원이기도 할 것이다. ‘아이가 되는 것. 받아주는 사람을 필요로 하는 것’(328쪽).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마음이 즐거우니까
《취중 마음 농도》는 술에 대한 애정을 빼면 단 하나도 겹치는 게 없는 설재인, 이하진 작가의 화합 실패기다. 편지의 시작부터 끝까지 두 주정뱅이는 그 무엇도 화합하지 못했다. 아니, 일치하려 애쓰지 않았다. 그저 그 누구보다 치열하게 자신의 취향을, 삶을, 스스로를, 취기를 빌려 용기 내 써 내려갔을 뿐이다. 술 한잔에 이야기를 주고받는다는 것은 서로의 공통점을 찾아가거나, 차이점을 좁혀나가는 과정이기도 하지만 자신을 오롯하게 드러내는 기회이기도 하다. 다름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는 한 소통은 유의미하고, 수많은 화합의 실패는 좌절이 아니다.
우리 삶도 마찬가지다. ‘거듭 미끄러지며 여러 곳에서 실패하지만 끝내 죽는 것에도 실패하며 살아보자’는 설재인 작가의 말처럼 나 자신을, 내가 사랑하는 모든 것들을 쉬이 놓지 않는다면 우리에게 실패는 결코 좌절을 뜻하지 않는다. 나아가 자신을 ‘자신’이게 만드는 것들이 세상이 정한 기준과 다를지라도, 행여 이를 희미하게 지웠냈더라도 괜찮다. 우리는 자신에게 좀 더 느슨해질 필요가 있으니까. 남들이 왜 그렇게 사냐고 핀잔을 줘도, 나만 이 세상에서 다른 것 같아도, 오늘 하루가 너무 고단하고 팍팍했을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뭐 어때?’라며 술 한잔에 스스로를 다독이는 마음으로 말이다. 백해무익한 술을 두 작가가, 그리고 우리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즐거우니까’, 하는 마음으로 마시는 것처럼.
《취중 마음 농도》는 인생이 혼술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홀로 마시기 적적한 순간을 맞이하는 모든 이들을 위한 혼술 메이트 에세이다. 삶에 술을 반려하게 된 당신에게 권한다.
우리, 함께 취해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