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택근무, 자율 회의, 연봉 협상, 정리 해고...
실리콘밸리에 덜컥 취직한 비전공 개발자의
달콤한 혹은 매운 직장 생활기
언론이나 매체에서 흔히 비치는 실리콘밸리의 이미지라면, 카페 같은 편안한 분위기의 사무실에서 개발자들이 푹신한 소파나 카펫 등 아무 데나 걸터앉아 일하는 자유분방한 모습이 떠오른다. 실리콘밸리 사람들을 보면 한국의 직장인들이 매일같이 겪는 출퇴근 지옥이나 잦은 야근, 회식 같은 고충은 평생 겪어볼 일이 없을 것 같다. 실리콘밸리는 한국과 달리 자유롭고 도전을 즐기는 문화를 지녔고, 그런 실리콘밸리 정신을 배워야 한다는 잔소리도 숱하게 들어 온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면 이곳에서 실제로 근무하는 사람들의 생각은 어떨까?
이 책의 저자는 한국에서 화학을 전공하고 호주, 캐나다를 거쳐 35세에 비전공 개발자로 미국 실리콘밸리의 의료 분야 스타트업에 취업한 지 10년이 된, 게다가 ADHD도 가지고 있어 한국의 시각에선 다소 별나다고 할 수 있는 이력의 소유자이다. 하지만 실리콘밸리에서 저자는 그저 평범한 개발자 중 한 명일 뿐이다. 실리콘밸리 자체가 한국과 비교하면 우리의 상상보다 훨씬 더 별난 곳이기 때문이다.
오직 재택근무 때문에 구글, 애플 등 대기업을 나와 스타트업으로 이직하고, 회의에 불참하거나 빠질 때 개인 사유를 당당하게 말하고, 정신과 상담받은 일을 근무 중에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하고, 회사가 상장될 때 갖고 있던 주식 시세 때문에 같은 직원끼리도 희비가 엇갈리는 등 한국 직장에서는 경험하기 힘든 실리콘밸리만의 생생한 에피소드가 펼쳐진다. 이 책을 통해 독자들은 언론에 등장하는 일부 천재들이나 괴짜 CEO들만의 이야기가 아닌, 실리콘밸리에서 우리처럼 하루하루 출근하며 먹고사는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를 접할 수 있다.
갑작스러운 해고 통보, 비싼 물가,
약물 중독자 등 여러 문제에도
실리콘밸리가 아직도 수많은 이들을
끌어당기는 힘은 무엇일까?
저자는 이런 실리콘밸리의 자유분방한 모습 뒤에 숨겨진, 우리가 지금껏 듣지 못한 어두운 면도 남김없이 드러낸다. 개인의 성과나 능력과는 상관없이 일괄적으로 처리되는 정리 해고에 이곳 사람들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충격받아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살인적인 물가에 억대 연봉을 받아도 원룸 월세 내는 것조차 빠듯해하며, 쉽게 우울증에 빠지는 사람들이 넘쳐나 정신과 상담 예약이 밀리기까지 한다. 겉보기에 너무나 풍족하고 자유로운 분위기 뒤에는 이렇게 속으로 곪아 있는 아픔과 고통도 공존하는 곳이 또 이곳 실리콘밸리인 것이다.
실리콘밸리가 속한 샌프란시스코 전체가 이제는 약물 중독자, 범죄, 불황 등으로 인해 디트로이트처럼 망해 가는 도시라는 말까지 듣기도 하지만, 저자는 그럼에도 허례허식이나 편견 없이 수많은 성향의 사람들을 포용하고 엉뚱한 아이디어도 인정해 주려고 노력하는 이곳 특유의 다양성이 실리콘밸리가 가진 가장 큰 힘이자 앞으로도 실리콘밸리의 미래를 이끌 원동력이라고 믿는다. 우리가 실리콘밸리로부터 진정으로 배워야 할 것은 대단한 기술이나 파격적인 혁신이 아니라 바로 이런 것들이 아닐까?
책에서 내내 묘사되는 실리콘밸리는 직장인의 유토피아도 무덤도 아니다. 실리콘밸리 역시 다른 곳들과 마찬가지로 다양한 모습이 모두 공존하는 또 다른 세계이다. 저자는 자신이 겪은 여러 사례를 통해 실리콘밸리의 속살을 날것 그대로 보여 주면서, 이곳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점과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점이 무엇인지 질문을 던진다. 실리콘밸리의 문화를 자신의 삶이나 직장에 적용하고 싶은 사람, 더 나아가 실리콘밸리를 비롯한 해외에서 새로운 도전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이 책이 나침반 역할을 해 주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