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의 작업은 언제나 삶에서부터 시작된다. 자신의 삶을 직접적인 주제로 드러내지 않는 예술가도 있지만, 그럼에도 작업하는 과정은 한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삶과 아주 가깝게 연결되어 있다. 특히 여성 예술가에게 있어 엄마가 되는 경험은 삶과 예술에 있어 커다란 변화의 계기가 된다.
최성임 작가의 네 자녀가 바라본 엄마의 삶과 작업
그리고 지금 여기 한 여성 예술가의 삶을 목격한 네 사람의 눈이 있다. 책 『네 개의 사과와 하얀 테이블』은 하얀 테이블에 둘러 앉아 아침마다 사과를 나누어 먹으며 자라난 최성임 작가의 아이들이 쓴 에세이집이다. 이 책의 특징은 여성 예술가 자신의 목소리가 아니라, 그의 삶을 가장 가까이에서 목격한 미성년 자녀들의 발화라는 점이다. 네 자녀가 쓴 에세이와 엄마의 작품을 모티브로 그린 그림, 그리고 "엄마됨"의 상태를 건너와 자녀들의 독립을 앞둔 작가의 글, 책의 내용을 아우르며 의미를 발견하는 미술비평가 김지연의 에세이가 실려 있다.
“엄마는 어디에 있든 항상 할 수 있는 작업을 했다.
우리를 학원에 데리러 올 때도, 주말 여행을 떠날 때도,
늘 차에 앉아서 실을 엮고 자르면서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해냈다.
언제든, 어디에 있든 항상 할 수 있는 것을 하고 완성해내곤 했다.”
네 아이들은 일상 속에서 발견한 엄마의 또 다른 모습, 한 예술가, 한 여성, 한 인간의 모습을 기록했다. 이 책 속에는 엄마와 예술가 두 가지 역할을 해내기 위해서 고군분투한 한 사람을 가장 가까이에서 바라본 시선이 있다.
처음에 아이들은, 시끌벅적한 여섯 가족의 일상 속에서도 시간을 쪼개어 작업하는 엄마의 모습, 손으로 하나하나 느리게 무언가를 만드는 엄마의 작업 과정을 이해할 수 없었다. “엄마, 그냥 기계를 쓰지 그래요?”라고 묻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한결같다. “글쎄, 나는 그 과정을 믿어. 노력엔 지름길이 없거든.”
"엄마됨"의 상태를 통과하는 여성 예술가
"엄마"가 아닌 한 사람을 발견하는 아이들의 놀라운 경험
엄마의 손안에 있던 실 조각과 ‘빨갛고 더러운 공’들이 수천, 수만 개가 쌓여 놀라운 풍경을 이루는 것을 목격한 아이들은 이제 안다. 예술 작품 뒤에는 언제나 숨겨진 과정과 예술가의 삶이 함께 존재한다는 것을. 그리고 엄마는 단지 ‘엄마’가 아니라 꿈과 욕망을 지닌 ‘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언젠가 수많은 맨드라미 앞에 섰을 때,
나는 엄마가 한 말을 비로소 이해하게 되었다.
끈기있게 실을 자르는 것과 같은 행동들이 엄마를 한 사람으로서,
더 나아가 예술가로서 온전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시인은 직업이 아니라 정신이라는 말이 있다. 그처럼 예술가 또한 직업이기도 하지만 어떤 상태나 정신이라고 할 수 있다. 여성 예술가에게 "엄마됨"의 상태는 육아라는 다른 작업을 잠시 거치며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과정이다. 그러니 삶과 예술은 경계 없이 섞여 있을 수밖에 없다. 이 책은 아이들의 눈을 통해 그러한 여성 예술가의 삶을 재발견한다.
자신의 자아와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모든 일하는 여성을 위한 이야기
책 『네 개의 사과와 하얀 테이블』에는 매일 함께 사과를 나누어 먹으며 한 예술가의 성장을 지켜보면서 자란 아이들의 이야기, 그리고 그 아이들을 키우면서 스스로 성장한 한 사람의 매우 입체적인 이야기가 담겨 있다. 순수한 아이들의 눈을 통해서, ‘엄마’이자 ‘예술가’인 한 사람의 삶을 재발견하며, 삶과 예술이 경계 없이 섞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책을 덮을 즈음, 이것이 비단 예술가만의 일일까 생각해보게 된다. 자신의 자아를 위해서 열심히 일하는 여성이 인생의 어떤 시기를 ‘엄마됨’에 할애하고자 한다면,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시간이다. ‘직업인’과 ‘엄마’로서의 여성은 양립하기 어려운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두 세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여성 개인의 희생이 요구된다.
하지만 여성이 엄마가 된다는 것은 자신의 삶을 포기하는 선택만은 아니다. 육아라는 또 다른 작업을 잠시 거치는 과정, 즉 잠시 머무는 "엄마됨"의 상태인 것이다. 또한 그 과정에서 ‘완벽한 방해꾼’이었던 아이들이 어느새 ‘섬세한 관찰자’이자 ‘동료’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이 책은 알려준다. ‘자기 자신’과 ‘엄마’로 대립하던 한 사람의 삶은 마침내 화해를 이룬다.
자신의 자아와 아이들을 모두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모든 일하는 여성에게 이 책이 용기와 위로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