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익스피어라는 창을 통해 본 런던
도시의 역사를 마음으로 공명한다는 것
런던의 골목은 유난히 꼬불꼬불하다. 세인트 앤드류 힐 거리는 1666년 런던 대화재 직후 건축가 크리스토퍼 렌의 기획이 무산되면서, 또한 최근에는 찰스 황태자가 현대 건축가들의 ‘도시 계획’을 막으면서 그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본문 202~203쪽). 덕분에 우리는 그 옛날 셰익스피어와 동료들이 바지런히 오갔을 거리를 따라 걸을 수 있다.
저자는 세인트 폴 대성당의 돔을 이정표 삼아 방향을 잡고 템스 강을 끼고 걸었다. 책의 각 장은 저자가 걸었던 골목의 지도가 그려져 있고, 산책 테마별 지명으로 구분되어 있다. 청년 셰익스피어는 고향에 어린 자녀와 아내를 두고 런던으로 떠났다. 《셰익스피어처럼 걸었다》 의 첫 장면은 이 대목에서 시작하는데, 이처럼 각 장은 셰익스피어 시점에서 그가 보았을 거리의 풍경들을 생생하게 그리면서 서두를 연다. 마치 희곡의 한 대목 같다. 1장 〈셰익스피어의 출퇴근길〉의 시작은 갓 스물을 넘긴 청년 셰익스피어가 상업으로 날로 번창하는 16세기 런던이라는 대도시에 입성하는 순간을 기록에 의거해 그가 입었을 법한 옷차림, 그리고 ‘아마도 이렇게 느꼈으리라’ 하는 흥분감을 가상의 상황으로 그려낸다. 저자는 그렇게 우리 손을 잡고 400년 전 런던으로 데려간다.
저자의 시선에 걸린 오래된 런던의 골목에 셰익스피어가 보았을 풍경들이 겹친다. 낡은 도시의 보도블록 틈새에서 홀로그램처럼 피어오르는 셰익스피어 시대 사람들. 저자는 공연·문화 기획자 특유의 관점으로 현대 런던을 소개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영화 〈브리짓 존슨의 일기〉에서 주인공이 고민 상담을 늘어놓던 그리니치 공원, 로즈 극장의 배경이 되었던 영화 〈셰익스피어 인 러브〉, 알게 모르게 헷갈리는 런던 브리지와 타워 브리지. 〈킹스맨〉의 콜린 퍼스가 나타날 것 같은 마이터 펍의 풍경, 기네스 펠트로와 다니엘 크레이그 등 굵직한 슈퍼스타들이 사는 동네 첼시 주변의 사정까지 우리가 알던 런던과 우리가 모르는 런던 사이에 징검다리가 될 만한 이야기들을 꺼내 놓는다.
셰익스피어는 왜 런던으로 갔을까?
생계형 예술과 삶에 대한 몰입
셰익스피어는 배우로서 직접 무대에 서기도 했고, 주주로서 극장을 경영했으며, 또 익히 알려진 대로 극작가로서 여러 계급의 사랑을 한몸에 받은 당대의 아이콘이었다. 저자는 각종 아포리즘과 ‘대문호’라는 권위의 벽에 둘러싸인 박제된 기호로서의 셰익스피어를 다루지 않는다. 누구보다 치열하게 삶에 집중하고, 라이벌과 관객, 그리고 후원자를 의식하며 치기 어린 하루하루에 몰두했던, ‘인간 셰익스피어’에 초점을 맞췄다.
그는 흥행 보증 수표와도 같은 극작가로 성공했지만 쉴 새 없이 신작들을 발표해야 했다. 청교도 세력이 연극을 저급 문화로 몰아붙일 때는 이를 계속하기 위해 귀족에게 머리를 숙이기도 했고, 후원자를 찾아가기도 했다. 다행히 당시 런던 사람들은 연극을 사랑했고 끊임없이 극장을 오갔다. 셰익스피어는 자신이 주주로 있던 극장 운영을 위해 하루 2,000여 명에 달하는 유료 관객들을 유치해야 했다. 한국의 연극계 사정에 정통한 저자의 부연 설명에 따르면 예술의 전당의 경우에도 하루 유료 관객 2,000명은 몇 작품에 손에 꼽을 정도로 어려운 일(본문 309쪽)이다. 밥 딜런의 노벨문학상 수상 소감 속 셰익스피어를 보면 책 전반에 드러나 있는 ‘생계형 예술가’로서의 그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그는 무대를 위한 말을 썼습니다. 읽기 위해서가 아니라 말해지기 위해서 대본을 썼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다루고 고려해야 할 일상적인 문제도 있었습니다. “자금 조달이 제대로 될까?” “후원자들을 위한 좋은 자리가 충분할까?” “해골을 어디에 가져다 놓아야 할까?” 저는 셰익스피어의 마음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질문이 이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게 문학인가?”
(본문 77-78쪽)
시대의 산물로서의 도시
다시없을 자유인들의 치열한 시대
셰익스피어는 생전에 두 명의 왕을 모셨다. 두 왕 모두 연극을 사랑했고 셰익스피어는 이 기회를 놓지 않았다. 왕권의 시대, 반역자들의 공개 처형이 공공연했던 그 시절 셰익스피어도 먼 친척의 처형을 경험했다. 연극을 사랑하는 왕들의 응원에 힘입은 그는 기민하게 움직였다. 또한 그는 기존의 법칙을 자유롭게 뒤엎는 사람이었다. 인간의 통속적 욕망을 과감하게 내보였다. 그의 시(소네트)는 과거 귀족들의 문법을 따르지 않았다. 이렇듯 셰익스피어와 그의 작품은 그 시대 각 주체와 구조가 빚어낸 산물이었다.
책은 셰익스피어뿐만 아니라 토머스 모어, 찰스 디킨스 등 굵직한 문호들의 이야기를 덧붙인다. 도시를 둘러싼 문화사다. 동시에 엘리자비스 여왕을 둘러싼 공공연한 비사(祕史)를 들려주며 왕권과 기타 권력 다툼 사이에서 흥하고 쇠락하는 연극의 시대, 그 초상을 묵묵하게 보여준다. 신분제라는 억압에서 몸부림치던 시대의 자유인들, 그들은 오로지 무대에서만 자유롭게 귀족과 왕가의 옷을 입을 수 있었다.
1장 〈셰익스피어의 출퇴근 길〉에서는 연극인들의 성지 ‘글로브 극장’을, 2장 〈영국 극장사의 잃어버린 두 개의 퍼즐〉에서는 영국 최초의 공공극장 ‘더 씨어터’와 브릭 레인의 골목 이야기가 소개된다. 3장 〈임대료는 붉은 장미 한 송이〉에서는 정인에게 땅을 주고 싶었던 여왕의 귀여운 횡포가, 4장 〈셰익스피어가 사랑했던 은밀한 후원자〉에서는 셰익스피어가 마음에 품었던 인물로 예측되는 사우샘프턴 백작을 둘러싼 이야기와 ‘링컨스 인 필즈’ 법학원 풍경이, 5장 〈젠틀맨 셰익스피어의 꿈〉에서는 마침내 ‘젠틀맨’이라는 문장과 칭호를 손에 얻는 통속적 욕망을 가진 셰익스피어의 말년이 그려진다.
글 중간 중간에 가난한 배낭에 샌드위치를 넣고 걸어 다녔던 저자의 실용적 여행 팁도 담겨 있다. ‘글로브 극장’에서는 단돈 5파운드면 ‘야드’ 입석에서 극을 볼 수 있고, 테이트 모던 갤러리 7층 옥상에 올라가면 2파운드의 값싼 커피 값을 내고 초고층 전망대가 부럽지 않은 저녁 풍경을 누릴 수 있다(본문 80쪽, 83쪽). 또 박스 쇼디치 거리에 가면 ‘플랫폼 창동 61’, 건국대 ‘커먼그라운드’ 등 한국의 도시 디자인에도 영향을 미친 컨테이너 팝업 스토어의 원형을, 브릭 레인의 ‘선데이 업 마켓’에 가면 런던 힙스터들을 만날 수 있다.
무언가를 안다는 것, 그리고 한 지역과 시대를 이해한다는 것은 단순한 지식욕으로만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눈을 감고 시뮬레이션을 해보는 공명의 순간을 찬찬히 시도해보는 것. 전지적 셰익스피어 시점에서 런던을, 그리고 그 시대를 바라보는 저자의 방법론은 분명 우리 삶에 ‘공감’이라는 인식의 회로를 뚫어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