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탐방, 문화탐방, 생태탐방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지리산둘레길 걷기에 나선 것은, 나를 둘러싼 도시와 문화적 환경이 나의 의식을 너무 고착시켰다는 답답함 때문이었다. 신영복 교수는 그의 저서 ‘담론談論’에서 우리가 일생 하는 여행 중에서 가장 먼 여행은 ‘머리에서 가슴까지의 여행’이라고 하였다. 이 말은 이성과 합리성이 만든, 우리가 갇혀 있는 완고한 인식의 틀을 깨뜨리고, 사람과 자연 그리고 세상에 공감하는 애정을 갖기까지의 여행을 의미한다. 바로 이 여행이 공부이고, 그 공부는 많은 시간이 걸리고 부단한 노력이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먼 여행은 ‘가슴에서 발까지의 여행’이라고 하였다. 여기서 발은 우리가 발 딛고 있는 삶의 현장을 뜻하며 애정과 공감을 우리의 삶 속에서 실현하는 여행이라는 뜻이다. 결국, 공부란 우리의 의식을 가두는 담벼락을 깨뜨려 애정과 공감을 삶 속에서 실현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신영복 교수는 담벼락을 깨고 애정과 공감을 실현하는 것이 변화이고 창조라 하였다. 그리고 변화와 창조는 중심부가 아닌 변방에서 이루어진다고 하였다. 지리산과 그 주변은 패배한 자와 쫓기는 자, 그리고 은둔한 자들의 삶이 녹아 있는 변방이다. 내가 지리산둘레길 탐방에 나선 것은 오랜 세월 나의 의식을 지배한 담벼락을 깨고 나를 변화시키기 위하여 변방을 찾는 행위이다. 여행은 걸으면서 하는 독서이고, 독서는 앉아서 하는 여행이라는 말도 있다. 그 말은 독서에서도, 여행에서도 찾을 수 있는 의미가 바로 공부라는 뜻이다. 결국, 지리산둘레길 탐방에서 내가 얻고자 한 것은 의식의 각성이고 자아의 재정립이다.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김종혁 연구교수는 “역사에서 ‘길’이란 무엇인가”라는 글에서 다음처럼 말하고 있다. “길이란 자연적이든 인위적이든 필요에 의해 형성되기 때문에 그 기능이 소멸하거나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길이 출현하지 않는 한,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다. 이 상황은 지금도 다르지 않아서 우리가 현재 이용하는 길은 대부분 그 형태가 조금 바뀌었을 뿐, 아주 오랜 기간을 두고 명맥을 이어오던 것들이다. 이 점에서 길의 역사성이 존재한다. 이처럼 길은 유구한 시간성을 담지하는, 박물관 안에 박제되어 있지 않은, 여전히 그 기능을 발휘하면서 살아 움직이는 역사적 유물이며 동시에 사료이다.” 이 말은 길에는 인간의 삶이 있고, 그 삶이 공유되고 습득되며 전달되는 과정에서 문화가 형성되며, 문화를 영위하는 과정에서의 사건이 역사가 된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즉, 길은 역사와 문화를 담고 있다는 뜻이다. 금강산은 빼어나지만 장중하지 못하고 지리산은 장중하나 빼어나지 못하다는 말이 있다. 그러나 지리산은 빼어나지는 못하지만, 장중하기에 그 속에 수많은 피난처를 마련해두고 쫓기는 자, 삶의 터전을 상실한 자들을 품어 주었고, 삶이 어지러울 때 큰 걸음으로 나와 세상을 꾸짖었다. 그래서 지리산의 모든 봉峰과 능선 그리고 골짜기와 자락, 그리고 마을에는 쫓기는 자의 역사, 패배자의 역사, 물러난 자의 역사가 있다. 비록 지금은 묻혀버린 역사이지만, 한때는 꿈을 지닌 자들의 역사였다. 그러기에 그들의 역사는 기록되지 않은 역사이다. 그리고 그 역사 속에는 그들에게 공유되고 습득되며 전달되는 문화가 있다. 지리산둘레길을 걸으면 기록되지 않은 역사를 읽을 수 있고, 그들의 문화를 엿볼 수 있다. 그리고 지리산과 그 주변의 자연은 살아 있는 자연이다. 자연은 자연이 필요로 하는 것을 필요한 곳에 만들어 놓기에 살아 있다. 그리고 자연은 인간이 만들 수 없는 것을 만들기에 위대하다. 그러나 인간은 인간이 필요로 하는 것만 자연을 파괴하여 만든다. 그런 점에서 자연의 변화는 살아 있는 변화이고, 인간이 물리적으로 가하는 자연의 변화는 죽은 변화이다. 결국, 지리산둘레길에는 역사가 있고, 문화가 있고, 생태계가 있다. 역사와 문화, 생태는 삶이다. 삶은 길을 통해 영위된다. 그래서 지리산둘레길은 길 있는 길이다. 다만, 천천히 걷는 자만이, 부릅뜬 눈을 가진 자만이, 천착穿鑿하는 사유思惟를 하는 자만이 볼 수 있는 역사이고 문화이며 생태계이다.
지리산둘레길은 지리산 둘레에 있는 전북특별자치도와 경상남도 그리고 전라남도에 속한 5개 시군인 남원시, 함양군, 산청군, 하동군, 구례군의 120여 개 마을을 잇는 총 274km, 800리의 긴 도보길이다. 숲길, 제방길, 논두렁길, 농로, 임도, 도로 등 다양한 형태의 길로 구성된 지리산둘레길을 걸으면 지리산 주변에 터를 잡은 마을 사람들의 삶을 살필 수 있고, 곳곳에 묻혀 있는 역사와 문화를 경험할 수 있으며, 계절에 따라 변화하는 생태계의 다양한 모습을 관찰할 수 있다. 지리산둘레길을 탐방하기 위해 지킨 원칙이 세 가지 있다. 첫째는 당일로 구간 탐방을 끝낸다는 것이다. 그런데 시간 조절 실패로 난이도 하로 평가되는 18구간을 이틀에 나누어 걸었으므로 이 원칙이 꼭 지켜진 것은 아니다. 둘째는 대중교통을 이용한다는 것이다. 부산 사상에서 첫 버스를 타고 남원, 함양, 산청, 하동, 구례로 가거나, 구포역에서 06:34에 출발하는 기차를 타고 하동과 순천으로 간 다음 시내버스나 군내버스를 이용하여 구간 시작점에 도착하였다. 군내버스 시간을 맞추지 못할 때는 택시를 타기도 하였다. 탐방을 마치고 부산으로 돌아올 때는 역순으로 교통수단을 이용하였다. 셋째는 전 구간을 혼자서 걷는다는 것이다. 1∼4구간은 2017년에 산악동호회원들과 함께 걸었던 구간이지만 혼자서 다시 걸었고, 9∼10구간도 동행자와 함께 걸었지만 혼자서 다시 걸었다. 혼자서 걸어야만 자세히 관찰할 수 있고, 세밀하게 분석할 수 있으며, 깊이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책에 실린 글은 기행문이다. 따라서 공간의 이동과 시간의 흐름에 따른 여정旅程이 있다. 그리고 보고 듣고 조사한 바를 기록한 견문見聞이 있다. 또 그 견문에 대한 느낌을 적은 감상感想도 있다. 이 중 여정과 견문은 지리산둘레길을 걷고자 하는 분들께 심층적인 안내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묘사와 분석에 치중하였다. 한편 감상을 통해서는 역사적, 문화적, 생태적 관점에서 세상을 향해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적었다. 감상에서 내가 하는 말은 독자의 생각과 다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감상은 처음부터 주관적이기에 다름을 인정하고 읽어주면 고맙겠다. 그리고 고유명사와 동음이의어 그리고 이해를 도울 필요가 있는 어휘는 한자를 함께 적었다. 이는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한 노파심에서 나온 것으로 이해해주면 좋겠다.
2024년 여름에, 지은이 손상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