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이란 현실에서 비롯되어 현실을 바꾼다
고난의 황무지에서 꽃핀 학문적 성취
『돌짝밭에서 진달래꽃이 피다』라는 제목에서 드러나듯 이명현 교수의 생애는 험난했다.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가족과 함께 공산 치하의 북한을 떠나왔지만, 곤궁한 삶을 벗어날 수 없었다. 제주에서 3년이나 늦게 국민학교에 들어갔고, 중학교에 입학했지만 과정을 마치지 못하고 상경했다. 목욕탕 일꾼, 전차 매표원 등으로 일하며 고된 청소년기를 보냈다. 하지만 학문을 향한 열정이 꺾이지 않았다. 독학으로 파고든 외국어는 서양 고전을 읽을 수준까지 향상되었다.
결국, 학문의 길이 열렸다. 장학금을 받아 서울대학교에 들어가고 미국 브라운대학에 유학도 떠났다. 미국에서 교수 자리를 얻을 여건이 되었지만, 가난한 조국을 재건하는 데 지식인이 힘을 보태야 한다는 일념으로 포기했다. 귀국 후 모교에 교수 자리를 얻었지만, 박정희 유신체제 이후 들어선 전두환 군사정권에 의해 해직되고 말았다. 그는 좌절하지 않고 그 기간을 학문적 식견을 넓히는 계기로 삼았고, 해직 교수 모임에서 실무를 맡아 분투했다. 칼럼니스트와 방송인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그리고 4년여가 지나서 복직되었다. 곤고가 거듭된 거친 삶을 헤쳐나가다가 40대 후반에야 반려자를 만나 혼인하였다.
가장 현실적이고, 가장 실천적인 철학에 힘쓰다
철학계와 교육제도 혁신을 이끈 선각자
그는 한국철학의 풍토를 새롭게 하는 데 헌신했다. 비트겐슈타인에 천착하며 독일철학과 사회철학 일변도의 한국철학계에 영미철학과 분석철학의 새로운 사조를 도입하며 학계 풍토를 바꾸어놓았다. 그는 한국철학회의 조직혁신을 앞서서 추진했다. 또한, 철학계의 변방으로 간주되던 아시아 국가 최초로 세계철학대회를 서울에 유치하고 성공리에 개최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담당했다. 서울대에 철학사상연구회를 조직하여 정착시켰으며, 김태길 교수의 뜻을 받아 한국철학 발전을 뒷받침할 조직인 심경문화재단을 설립에 조력하였으며 이후 이사장을 맡았다. 계간지 《철학과현실》을 발행하는 데도 힘을 보탰고, 창간 때부터 편집인으로 역할을 맡다가 나중에는 발행인이 되었다. 후학들은 이명현 교수의 이러한 헌신에 대해 깊은 존경과 감사를 드러낸다.
또한, 그는 한국 사회가 경제적으로 발전하며 특히, 정신적으로 성장하는 데 큰 관심을 두고 사회봉사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여러 시민사회운동 단체의 설립과 운영에 관여하며 중책을 맡기도 했다. 열정적 교육자인 그는 한국 교육정책의 혁신에 큰 공헌을 했다. 김영삼 정부 시절 대통령 자문 교육개혁위원회 상임위원과 교육부장관으로 봉직하며 ‘5·31 교육개혁안’과 이른바 ‘교육 3법’을 만들고 추진하는 데 열정을 쏟았다. 새로운 문명에 맞는 새로운 교육제도가 있어야 한다는 신념으로 그가 제시한 교육개혁의 비전은, 현재 일부는 실현되었으나 미완으로 남은 과제도 많다.
85세 철학자의 마지막 조언
철학은 시대의 내비게이션이 되어야 한다!
이명현 교수는 ‘철학’과 ‘현실’의 불가분성을 강조한다. 철학이 직접적으로나 실용적인 방식으로 현실에 영향을 끼치지는 않더라도, 현실을 떠나서 존재할 수 없으며, 현실에 응답하며 현실을 해석하고 현실을 개입하는 힘을 발휘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에게 철학의 역할은 현실을 드러내는 ‘개념의 지도’이며 현실의 방향을 안내하는 ‘내비게이션’이다. 따라서 지금 우리의 현실에서 진리의 향방을 제시할 ‘자생 철학’이 요구되며, 인류 문명의 변화에 적합한 ‘내일을 바라보는 철학’이 요구된다. 즉, ‘신문명’에 걸맞은 ‘신문법’과 ‘신교육’이 절실하다. 이러한 이명현 교수의 철학관은 『돌짝밭에서 진달래꽃이 피다』와 함께 출판되는 『철학은 시대의 내비게이션이다』에서 자세히 설파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