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길을 메우던 사람들
빛과 그림자가 공존하던 풍경
70~80년대의 금호동은 낙후된 달동네였다. 작가는 그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며 맺은 인연들을 추억한다. 좁은 골목길을 사이에 두고 복작거리며 살던 금호동에는 작가의 부모님이 생업을 이어가던 금남시장이 있었다. 골목길에서 본드에 취해 널브러져 있곤 하던 친구 진석이는 어느 날 죽었다는 소문과 함께 사라진다. 혼자 지내는 시간이 많아 심심해하는 어린 작가를 자전거에 태우고 시장을 누비곤 하던 배달원 용순이 누나는 시집을 가면서 작가의 삶에서 갑자기 퇴장한다. 작가의 부모님 집에 얹혀살며 이따금 어린 작가를 업고 밤 산책을 나가던 여공 미선이 누나도 있었다. 작가는 그의 등 너머로 떠오른 달빛을 보며 누나의 마음을 헤아리기도 했다. 어린 시절엔 시간의 속도만큼이나 인연도 빠르게 지나간다. 하지만 그 기억은 살아남아 그리움이 된다. 당시엔 정체를 알 수 없던 감정들도 질기게 이어져 식은땀처럼 가슴에 맺힐 때가 있다.
뜨거운 순대를 품고 내달리던 크리스마스이브
거칠지만 낭만 가득했던 시간
이 책에는 한 번 만나면 잊을 수 없는 강력한 캐릭터의 친구들이 등장한다. ‘인삼찻집’을 운영하는 어머니를 둔 경희와 미국 여배우 멜리사 길버트를 닮은 효진이. 성인잡지 「허슬러」를 보여주며 남자 되는 법을 열강하던 ‘구라쟁이’ 동환이, 노래와 복싱을 다 잘해서 뭐가 될지 고민하던 ‘차용필’ 용섭이. 말을 더듬지만 싸움을 잘해 작가를 지켜주던 윤구. 이들은 출신 학교와 동네를 막론하고 누구나 옛 기억 속에 한 명씩은 있을 법한 친근한 인물들이다. 1984년 학창 시절 마지막 크리스마스이브에 뜨거운 순대를 품고 거리를 달려야 했던 용준이는 젊은 날의 치기를 드라마틱하게 보여준다. 이런 이야기는 현재의 관점으로 옳고 그름을 재단할 수 없는, 그 시절을 함께 통과한 이들만이 평생 두고두고 우려먹을 수 있는 낭만과 추억이 아닐까?
추운 겨울을 녹여준 배춧국과
무더운 여름날의 ‘어름’ 화채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도 순식간에 과거로 돌아가게 하는 것이 있으니 바로 ‘맛’이다. 작가는 금호동에 살던 어린 시절에 먹고 마셨던 음식을 그날의 풍경과 함께 기억한다. 작가가 열두 살 되던 해, 겨울 아침 밥상에 차려져 있던 배춧국을 떠올리고, 미국 생활 중에는 어릴 적 어머니의 방식대로 김을 구워 먹다가 문득 어머니가 김을 제대로 드시는 걸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눈물을 삼킨다. 고등학생 이모가 이른 아침 등교 전 먹다 남긴 라면을 먹으며 엄마의 안쓰러운 뒷모습을 바라보던 기억, 부모님이 퇴근하기 전에 동생에게 수제비를 해주던 누나. 황달을 앓던 형에게 회를 마음껏 사주지 못했던 아버지, 에어컨도 없던 여름날 수박화채를 위해 부리나케 ‘어름’을 사 오던 형의 모습까지, 음식의 기억은 어김없이 그 시절의 풍경을 소환한다.
응답하라, 금호동!
7080세대의 영원한 노스탤지어
모두가 가난하기에 서로 의지하며 살았던, 그래서 이웃이 혈연보다 끈끈하던 시절. 작가의 부모님은 시장에서 그릇 장사도 하고 가내수공업 공장도 하며 자식을 키웠다. 아버지는 시장에서 만난 40년 지기인 기름집 아저씨가 세상을 떠나자 심하게 우울해했다. 그 아저씨의 딸 명숙이와는 친하게 지내다 그가 미국으로 이민을 가면서 영영 헤어지게 된다. 황달을 앓던 형을 돈을 받지 않고 치료해주었던 김소아과 원장님은 여전히 금호동에 살고 있었다. 우연히 냉면집에서 그를 발견한 작가는 몰래 식사비를 계산하며 마음의 빚을 조금이나마 갚는다. 오랜 인연이 순간에 끊어지기도 하고, 가느다란 인연이 국수 가락처럼 길게 이어지기도 한다.
15년여의 외국 생활을 마치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 작가는 한동안 공중에 붕 떠 있는 기분으로 살았다. 그의 어린 시절이 새겨진 금호동은 재개발로 인해 영영 사라졌고 이제 다시는 갈 수 없는 곳이 되었다. 집을 잃은 작가는 그 시절의 기억을 엮어 마음의 집을 새로 짓듯 이 책을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