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과 동지가 선명하게 구분되던 때가 있었다. 흑과 백, 어느 한 편에 서서 목소리를 높이고 내 편과 네 편으로 나뉘어 저마다 주먹을 불끈 쥐고 허공을 향해 외쳤다. 자유와 번영 그리고 인권을!
이념 대립이 사리진 지금, 우리가 서성이고 있는 이곳은 대체 어디인가?
인간 존엄의 가치를 위해, 국민이 잘 사는 사회를 위해 모두 ‘일 잘할 것 같은 정치인’을 찾아 헤매 다니는 이 광야는 여전히 내일을 알 수 없는 짙은 안갯속이다. ‘정치(政治)’라는 단어에 함축된 본질은 ‘우리’에 있다. ‘우리’라는 응축된 힘없이 정치는 움직이지
않는다. 사회적 가치의 권위적 분배, 공익, 권리 국가의 본질과 미래, 이런 피부에 닿지 않고 멀게만 느껴지는 꾸밈말에 ‘우리’는 매우 피곤하다. ‘일 잘할 것 같은 정치인’에 열광하고 열광한 만큼 실망한다.
이 책은 1961년 5월 16일 박정희가 쿠데타를 일으킨 때부터 시작된다. 박정희는 9대 대통령 재임중인 1979년 10월 26일 홀연히 세상을 뜬다. 고뇌의 시작점이다. 때에는 박정희의 걸음은 멈추었지만, 김대중의 길은 아직 많이 남아있었다. 이 책은 박정희가 세상을 떠난 1979년까지를 다룬다.
그 시절 박정희와 김대중은 체제와 반(反)체제의 구심점이었다. 1969년 3선 개헌을 계기로 대통령 박정희와 김대중의 길은 달라지기 시작한다. 권력이란 한번 거머쥐면 놓을 수가 없다. 경제부흥의 거대한 축을 이룬 박정희의 업적은 컸으나, 장기 집권이라는 트라우마가 드리운 그늘은 칠흑같았고 추웠다. 그리고 그 어두운 장막 너머에는, 선거를 통한 ‘평화적 정권교체의 희망’이란 싹을 틔우는 야당의 기수들이 있었다.
이 책은 1961년에서 1979년까지 18년간의 박정희와 김대중, 김대중과 박정희의 엇갈린 길을 외신(外信) 기사를 길잡이로 삼아 살펴본다. 1960~70년대 외신은 지금과는 달리 막강한 위상을 갖고 있었다. 국내 언론이 다루기 어려운 뉴스를 전했고, 국내 언론과 다른 시각으로 분석하고 전망을 제시했다. 당시 우리나라는 언론에 대한 정부 간섭과 통제가 극심하던 시절이기에 외신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외신의 입으로 우리 현실을 세상에 알리고자 했던 시절이었다. 국내에는 미국과 일본의 신문들이 배포됐고, 타임(TIME)지와 뉴스위크(Newsweek)지가 판매됐다. 그러나 한국 문제를 다룬 기사의 군데군데가 먹칠이나 가위질이 돼 있거나 페이지가 빠져있기도 했다.
제한된 자유 안에서 우리는 박정희와 김대중이 제시한 꿈을 따라 걸었고 또 그들이 울타리 친 세상 안에서 노력했다. 그렇게 쫓겨도 보고, 외치기도 하면서 먼 길을 온 뒤 돌아보니, 우리는 그들이 닦은 길 위에, 그들이 만들어 남긴 세상 안에 살고 있었다. 지금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나라는 박정희와 김대중이 그렇게 꿈꾸던 나라였고 그들이 애써 가꾼 세상이었다. 우리는 그렇게 노력하고 제약받고 투쟁했다. 우리의 노력이 정당하게 평가받고 우리나라가 정의로운 존재가 되기를 바라면서 열심히 꿈을 좇으며 살아왔다. 우리 국민 가운데는 이 두 지도자에게서 아직 받아낼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많은 것을 빚졌다고 고마워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지금도 세상은 어수선하다. 역사가 계속되는 동안 세상은 계속 그렇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