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음악이, 혹은 그 어떤 다른 예술 형태라도, 그 자체로 해답이 될 거라고 느낀 적이 없다. 음악가는 먼저 인간이며, 삶에 대한 그의 태도가 그의 음악보다 중요하다. 그 둘은 결코 분리될 수 없다.” “나는 예술가다. 그러나 내 예술을 실행함에서 나는 일개 육체 노동자일 뿐이다. 평생을 그래왔다.” _ 파블로 카살스
“이 작은 책은 비단 음악을 사랑하는 분들뿐만 아니라 삶을 사랑하는 분들을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이 책에 담긴 소박한 지혜의 말들은 파블로 카살스 생전만큼이나 지금도 진실한 울림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_ 엮은이 줄리언 로이드 웨버
**옮긴이의 말
때로 어떤 음악가의 명성은 그가 행하고 이룬 바를 뛰어넘어 드높은 위상을 획득하곤 합니다. 엄청난 업적에 세상의 감사와 선의가 더해진 숭상이겠습니다. 제대祭臺 위에 놓인 거인의 동상 앞에 선 사람들은 삼가 공경하는 마음이 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감히 조금의 흠집도 낼 수 없는 명성이요, 짐짓 어깃장을 부려보자 싶어도 대단한 불경죄의 심판대에 오를 각오를 단단히 해야 하는 압도적 높이입니다. 보통 이런 위인들에게는 ‘거룩할 성聖’ 자가 붙곤 합니다. 괴테는 시성詩聖이라는 칭호로 숭앙받았고, 베토벤은 ‘음악의 성인樂聖’으로 우러름을 받습니다. 그리고 이 책의 화자이자 주인공인 카살스 역시 ‘첼로의 성자’라는 표현이 몸에 착 달라붙는 옷처럼 자연스럽습니다.
생각해봅시다. 카살스 만한 연주자가 흔히 있었던가요? 자신이 종사한 악기에서 일가를 이룬 사람들이야 적지 않습니다만, 만약 그 악기 연주의 역사를 그 사람의 전과 후로 나눌 수 있는 인물을 꼽아보라 하면 다섯 손가락을 채우기도 쉽지 않습니다. 바이올린에는 파가니니요, 피아노에는 리스트이며, 노래는 엔리코 카루소와 마리아 칼라스 정도가 전부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첼로라는 악기가 독주 악기로서 위상을 획득한 건 누구보다 그의 공로였습니다. 주법의 혁신을 가져온 것은 물론이요, 첼로의 구약성서라 불리는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이라는 작품집을 연주회용 레퍼토리로 격상한 것이 또한 카살스였습니다. 음악평론가 하비 색스는 “오늘날 활동하고 있는 첼리스트 중에서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카살스가 남긴 혁신의 혜택을 받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단언했습니다. 첼로의 역사를 ‘비포 카살스’와 ‘애프터 카살스’로 나누어 마땅한 근거입니다.
그가 올라선 제대를 떠받치는 기둥이 음악뿐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에게 ‘성자’의 광휘가 더해진 이유는 음악 바깥의 행적에 기인한 바 큽니다. 카살스는 음악 이외의 분야에서도 분명히 자기 목소리를 낸 거인이었습니다. 군사 정권에게 멱살 잡힌 조국 스페인의 운명을 비통히 여겼고, 그에 앞서 세계 어디서든 평화와 자유, 민주를 갈망하는 목소리를 내길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프랑코 정권이 들어서자 조국의 독재 상황에 동조하거나 침묵하는 국가에서는 결코 무대에 서지 않겠노라 공언했고 그 다짐을 행동으로 실천했습니다. 전 세계의 존경을 받는 음악가가 망명 상태에서 벌이는 반정부 활동에 심기가 불편해진 프랑코의 최측근 인사는 한 라디오 방송에 출연해 “만약 카살스를 생포하게 되면 당장 그의 팔을 팔꿈치 아래로 절단해 버리겠다”는 극언을 서슴지 않았다고 합니다.
대의를 위해 자신의 이익을 희생하는 그의 자세는 다른 면에서도 빛났습니다. 카탈루냐 사람들에게 좋은 음악을 접할 기회를 제공하겠다는 뜻으로 1920년 파우 카살스 오케스트라를 창단했고, 악단의 연주 기량이 일정 수준에 오를 때까지 몇 년간 사재를 털어 단원들에게 급료를 지급하며 연습시켰습니다. 뿐만 아니라 형편이 어려운 이들도 큰 경제적 부담 없이 훌륭한 음악을 만날 수 있도록 ‘노동자 연주회 협회’를 조직했습니다. 월수입이 500페세타에 미치지 못하는 이들이 오직 주머니 사정 때문에 음악에 다가가지 못하는 부조리를 막기 위해 소액의 연회비만 내면 협회의 회원으로 받아주었고, 회원들을 위해 연 6회의 무료 연주회를 개최했습니다.
**책 속에서
이 책에서 우리는 카살스 본인의 육성과 주변인들의 회억을 통해 첼로의 성자와 만납니다. 한 줄짜리 촌철에서부터 비교적 긴 길이의 일화까지 모두가 카살스의 진면목을 짐작케 하는 값진 단편들입니다. 본문에는 담기지 않은 예화 하나를 덧붙이며 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1971년 10월 24일, 파블로 카살스는 뉴욕의 유엔 총회에 모습을 나타냈습니다. 그의 평생의 공적을 기리는 유엔 평화 메달을 수여 받는 자리였습니다. 유엔 사무총장 우탄트는 다음과 같은 치사와 함께 카살스의 목에 메달을 걸었습니다. “돈 파블로, 당신은 진실과 아름다움, 그리고 평화에 당신의 삶을 바치셨습니다.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또한 한 사람의 예술가로서 당신은 이 유엔 평화 메달이 상징하는 이상을 실천하셨습니다. 깊은 존경을 담아 이 메달을 당신께 수여합니다.” 카살스는 다음과 같은 인사말로 화답하며 첼로를 집어 들었습니다. “나는 근 40년 동안 대중 앞에서 연주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연주를 해야겠습니다. 이 곡은 ‘새들의 노래’라고 불립니다. 하늘을 나는 새들이 ‘피스(평화), 피스, 피스’ 하고 노래합니다. 이 음악은 바흐와 베토벤, 그리고 모든 위대한 음악가들이 사랑하고 우러렀음 직한 그런 곡입니다. 무척 아름다운 곡이며, 내 조국 카탈루냐의 영혼과도 같은 음악입니다.”
“첼로는 나의 가장 오랜 친구이자 가장 소중한 벗이다.”
“가르치는 것은 배우는 것이다.”
“가장 완벽한 기교는 조금도 인식되지 않는 기교다.”
“어느 작품이건 매번 다시 고찰하지 않는다면 어찌 생동감 있는 연주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해마다 봄이 되면 나무에선 새파란 잎사귀가 돋아난다. 그러나 그 모습은 매년 다르지 않던가.”
“지난 80년 동안 나는 매일 똑같은 방법으로 하루를 연다. 기계적인 루틴은 아니지만 내 일상생활에는 필수적인 그 무엇이다. 나는 일어나면 피아노로 가서 바흐의 〈전주곡과 푸가〉를 두 곡씩 친다. 이것 말고 다른 방법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건 생각조차 할 수 없다. 이것은 마치 내가 거하고 있는 공간에 내리는 축복과도 같다.”
“내가 지금까지 첼로를 켜오며 그토록 행복했다면, 모든 악기 중 가장 위대한 악기인 오케스트라를 손에 넣을 수 있다면 어떤 기분이 들겠는가!”
“내 관심은 오로지 음악 연주에 있다. 그리고 오케스트라보다 나은 악기가 있을 수 있겠는가? …… 음악을 심오하게 느끼고 자신의 가장 깊고 가장 내밀한 생각 그리고 감정의 모양과 형식을 음악으로 옮기고 싶은 사람에게는 오케스트라만 한 매개체가 없다. 또한 오케스트라는 협력이라는 사상을 골자로 하고 있기에 매력적이다. 여러 사람이 모여 음악을 만들어내는 경험에 나는 매료되지 않을 수 없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직후 인터뷰에서 카살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전쟁 중에도 영국인들은 문명의 불꽃을 꺼트리지 않고 사수했음을 역사가 늘 기억할 것입니다. 그런 일이 가능하다는 걸 직접 목격할 수 있어서 대단히 행복합니다. 이 전쟁이 시작되던 당시 나는 이미 노인이었고, 오늘은 그때보다 더 나이 들었지만, 지난 몇 년간 나는 참으로 충만한 삶을 열심히 살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세계 전역을 덮은 거대한 변화를 견뎌냈고, 그 무엇보다 혐오스러운 형태의 두 독재 정치 체제가 무너지는 걸 목도했습니다. 이 모든 모습을 살아내고 나니 새로운 힘이 생김을 느낍니다.”
“때때로 내 주변을 둘러보면서 완벽한 절망감에 사로잡히곤 한다. 오늘날 세계를 괴롭히고 있는 혼돈 속에서 나는 삶의 가치 그 자체를 무시하는 현상을 발견한다. 아름다움은 우리 주변 어디에나 있지만 얼마나 많은 이들이 이를 알아보지 못하는 눈뜬장님인가! 두 눈을 뜨고서도 이 지구상의 경이를 조금도 보지 못하는 자들이 천지다. 사람들은 정신없이 바쁘게 살고 있지만 자신의 삶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는 거의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마치 길을 잃고 자포자기한 이들처럼 흥분 그 자체를 위한 흥분을 추구한다.”
“나는 어디에서나 거룩한 신성神聖을 본다. 음악에서, 바다에서, 꽃 한 송이에서, 나뭇잎 하나에서, 친절한 행동 하나에서. 이 모든 것에서 나는 사람들이 하느님이라 부르는 존재를 본다. 그리고 내게도 이 거룩한 신성의 요소가 있다. 그리고 바로 그것이 더 높은 무엇인가, 너무나도 높아 믿지 않고는 달리 도리가 없는 그 무엇인가의 존재에 대해 내게 일러준다. 그리고 나는 다른 그 어떤 것보다도 음악의 기적 속에서 신성을 본다. 바흐나 모차르트 같은 음악가들이 창조한 소리는 뭔가 무한히 선량한 것, 뭔가 ‘거룩한 것’을 생각하지 않고는 그 누구도 설명할 수 없는 기적이다.”
스트라디바리우스를 사용하지 않는 이유를 묻는 질문에 카살스는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카살스의 소리를 듣는 편을 선호합니다.”
“은퇴라고? 은퇴는 상상조차 할 수 없다. 나와 같은 직종에 종사하는 사람이라면 그 누구도 은퇴할 수 없다는 게 내 생각이다. 정신이 남아 있는 한은 말이다. 내게 일은 곧 삶이다. 그 둘은 결코 분리될 수 없다. 따라서 ‘은퇴한다’는 것은 내게는 곧 죽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일을 하면서 일에 싫증을 내지 않는 사람은 결코 늙지 않는다. 가치 있는 것에 흥미를 잃지 않은 채 꾸준히 일할 수 있다면 그만한 노화 방지 특효약도 없다. 나는 하루하루 새로 태어난다. 매일매일 새로 시작하는 것이다.”
**파블로 카살스 Pablo Casals, 1876-1973
예술가의 책무와 헌신을 강조하고 실천한 20세기 첼로의 거장이다. 1890 바르셀로나 고악보서점에서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 악보를 발견하고 입수해 모음곡을 세상에 널리 알리고 연주회용 레퍼토리로 격상시켰으며, 모음곡 전곡을 최초로 녹음(1936-1939)했다. 1876년 12월 29일 스페인 카탈루냐 지방에서 교회 오르가니스트의 장남으로 태어나 부친에게 음악을 배운 뒤 바르셀로나 시립음악학교에서 본격적으로 첼로 수업을 받았다.
1899년 파리에서 라무뢰 오케스트라와 협연해 독주자로 입지를 굳혔고, 1901년에는 80여 회의 미국 순회 연주를 했다. 이후 티보, 코르토와 함께 카살스 삼중주단을 결성해 1937년까지 왕성한 연주와 녹음 활동을 펼쳤다. 사재를 털어 ‘파우 카살스 오케스트라’를 창단하고 노동자연주회협회를 만들어 노동자를 위한 음악회를 열었다. 이후 프랑코 독재 정권과 서방의 모호한 태도에 항거하며 한동안 공개 연주를 거부하고 프랑스 프라드에 은둔했다.
1950년 바흐 서거 200주년 기념 연주를 계기로 프라드에서 연주를 재개했고 이후 프라드 페스티벌과 푸에르토리코 카살스 페스티벌을 이끌었다. 1971년 유엔 총회에서 자작곡 〈유엔 찬가〉를 초연 지휘하고, 인류의 평화를 기원하며 ‘새들의 노래’를 연주했다. 1973년 이스라엘 음악제에서 마지막 연주 후 그해 9월 타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