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뵙겠습니다. 어느 쪽 눈이 다친 눈이죠?
겉으로 봐선 전혀 모르겠네요.“
서연주 작가를 처음 만났을 때를 회상해본다. 비 오는 어느 평일 오후, 여의도성모병원 근처의 건물 상가 카페에서 그를 만났다. 그는 약속 시각에 10분 늦었고, 자리에 앉으며 피를 토하는 환자가 갑자기 병원에 들어와 처치하고 오는 길이라며 미안하다고 했다. 사고 당시를 묻는 질문에 그는 특유의 가늘고 긴 꼬리를 가진 눈으로 천진하게 웃으며 당시의 처참하고 긴박했던 상황을 이야기했다. 혹여라도 듣는 이가 놀랄까 의사 특유의 올곧음에 부드러운 위트가 섞인 채였다. 그의 사고명은 한쪽 안구 파열과 안면부 분쇄 골절. 이렇게 밝고 아름다운 청년의 한쪽 눈이 영원히 어둠에 갇히게 되었다는 사실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
“2022년 11월 6일 일요일. 강원도 인근의 외승 센터에서 낙마 사고가 있었습니다. 눈이 부시게 아름다운 가을의 낮 풍경이 마지막 장면이었다는 것 말고는, 사고 전후 수 시간가량의 기억이 지금도 떠오르지 않습니다.” _10쪽, 「시작하며」
그는 자신이 겪은 사고와 그와 관련된 사람들, 어떻게 말을 타게 됐으며 마지막 기억은 무엇인지 차근차근 얘기해주었다. 마치 어젯밤 꾼 꿈을 이야기하듯이 그는 편안해 보였다. 의식적으로 그의 눈을 쳐다보지 않으려고 했지만, 미소를 머금은 눈은 다친 눈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자연스러워 자연스럽게 눈을 맞추게 되었다. 그러다 문득 시선을 거두길 여러 번, 그런 상대의 마음을 읽은 것인지 그는 “어디가 아픈 눈인지 잘 모르겠죠? 실제로도 그렇게 나쁘지 않아요. 너무 걱정 마세요”라고 말하며 처음 만난 이를 배려해주었다. 긴 고통의 시간을 겪고 단단해진 사람의 배려였다.
결코 끝나지 않은 고통의 여정에서
의사이자 환자로, 장애인으로 느끼고 깨달은 것들
그는 1년 6개월이라는 시간 동안 총 일곱 번의 수술을 받으며 좌절과 일어섬을 반복했다. 의사라고 해서 뾰족한 수는 없었다. 오히려 자신의 상태를 누구보다 더 잘 알기에 실체에 다가가기를 머뭇거렸고, 예측할 수 없는 고통이 올 때면 무력함과 막막함을 동시에 느꼈다. 그도 어쩔 수 없는 수동적 위치의 환자였다. 복잡한 병원 시스템에 환멸을 느끼고, 진료를 받기 위해 기약 없이 기다리는 처지였으며 의사가 하는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해 우왕좌왕했다. 고통과 회복의 여정에서 그가 마주한 것은 ‘환자의 입장’이었다. 왜 환자들이 그런 질문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 얼마나 의사와 소통하고 싶은지, 진료실 밖 대기하고 있는 환자의 심정은 어떤지 등 지금까지 의사로서 미처 헤아리지 못했던 의사와 환자, 병원의 현실이었다.
“예약 시간과 무관한 것이 진료 차례라는 것을 이번에 알게 되었다. ‘이렇게 오래 기다리게 할 거면 예약 시간은 왜 잡는담!’ 의사로 일할 때는 미처 몰랐다. 환자들이 줄지어 밀려왔기에 누가 얼마나 기다렸는지 헤아릴 틈이 없었다. 이런 줄 알았으면 ‘오래 기다리시느라 힘드셨겠다’는 말 한마디라도 건네는 건데.”_130쪽, 「고효율 인간이 못 견디는 비효율의 삶」
치료를 받던 중 의사로 복귀하며 마주한 ‘의사 파업’ 이슈에 대한 의견도 담았다. 공교롭게도 4년 전 같은 이슈로 파업을 선도했던 입장이었다. 그러나 이번은 달랐다. 정치적으로 이용당하기를 거부하고, 의사와 환자의 처우에 집중하기 위해서 본래의 자리로 복귀해 환자들을 살피기로 했다. 의사는 환자를 봐야 한다는 것이 그가 배운 것이고, 이 싸움에서 환자가 피해자가 되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장애인 등록을 하기 위해 시행착오를 겪던 날의 이야기도 주목해야 할 이야기 중 하나이다. ‘심한 장애인’ ‘심하지 않은 장애인’으로 장애인의 등급을 매기고, 다양한 장애 상황은 고려하지 않은 채 단계마다 기관에서 요구하는 복잡하고 어려운 서류들, 심사 기준, 비용 등 장애인과 장애인 가족에게 상처를 입히고 사회로부터 배제된 느낌을 주어 재활 의지를 꺾는 현실도 꼬집었다.
“어디까지가 심한 정도이고, 어디까지가 심하지 않은 정도란 말인가. 이 과정에서 많은 장애인과 가족들이 마음을 많이 다친다. 실제로 내 동생은 내가 ‘심하지 않은 장애’로 분류되었다고 했더니, 왈칵 눈물을 쏟았다. 갑작스러운 신체 상실로 장애인과 그 가족들이 겪은 고통을 국가가 가벼이 여기고 폄훼하는 기분이 든다고 했다. 누군가에게는 극심한 고통이 국가가 볼 때는 별것 아닌 걸로 치부되는 느낌이랄까.”_185쪽, 「심하지 않은 장애인이라고요?」
외로워도 슬퍼도 눈물 대신 윙크를!
의사 서연주, 온기를 전하는 진정한 치유자를 꿈꾸다
한쪽 눈 실명이라는 사고를 통해 얻은 깨달음은, ‘사람이 가장 위대한 치료제’라는 것이다. 아무리 좋은 의술도, 약도 아픈 이를 낫게 하는 데는 한계가 있으며 정말 고통스러운 사람에게는 진심이 담긴 따뜻한 말 한마디가, 조용히 쓰다듬어주는 손길이, 온전히 나를 위해 기도하는 사람의 마음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다. 어떤 대가도 바라지 않고 자신의 눈을 선뜻 내어주겠다는 동생과 끊임없는 헌신과 사랑을 주시는 부모님 그리고 우리가 있으니 무엇이든 해보라는 동료들이 있기에 지금의 서연주가 존재할 수 있음을 알게 된 지금, 그는 열심히 살아내어 보답하며 살겠다는 다짐을 한다.
“미래가 창창한 젊은 의사였던 제가 갑자기 환자가 되고, 장애를 갖고 살아가는 경험을 하게 된 데에는 분명 의미가 있을 거라 믿습니다. 그 의미를 기필코 찾아내어 저는 제 자신과 환자 그리고 대한민국 사회를 치료하는 상처받은 치유자Wounded healer가 되려고 합니다. 이것은 욕심 많고 하고 싶은 것도 많았던 제가 갑작스런 사고를 당하고도 꺾이지 않도록 따뜻한 사랑으로 감싸주신 분들 덕분에 할 수 있는 일들입니다.”_261쪽, 「마치며」
수술과 회복의 과정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앞으로 또 어떤 위기가 닥쳐 의사 서연주를 환자 서연주의 자리로 데려다 놓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제는 겁내지 않는다. 그의 옆에는 온전히 그를 사랑해주는 사람들이 있고, 그를 필요로 하는 자리가 있기 때문이다. 한없이 나약하고 가장 고통스러웠던 시절을 모두 글로 담아냈다. 자신처럼 고통의 터널을 지나고 있을 사람들을 위해서이다. 외로이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을 사람들에게 따뜻한 친구이자 믿음직스러운 의사로, 영원한 상실을 겪은 장애인으로 조용히 손잡아주고자 한다. 부디 감당하기 힘든 고통 속에 있는 분들이 있다면 이 책을 통해 아주 잠시라도 위로를 느끼길 바라며, 씩씩하고 밝은 환자이자 의사 그리고 상처 입은 이들의 친구가 되고 싶은 치유자, 서연주의 행보에 많은 관심을 당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