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외길 ‘낭만 의사’, 인천공항 의료센터장이 들려주는 국제공항의 생로병사와 ‘의사의 길’
1. 의료계와 정치권이 읽어야 할 진료 현장 이야기
“소아과 의사들은 의사소통이 잘 되지 않는 아이들을 치료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을 데리고 온 부모도 따뜻한 마음으로 위로하고 아이들을 건강하게 키우기 위한 조언이나 충고, 교육도 해야 한다. ...... 공항 의료센터 진료실에서 만나는 환자들 중 어린이의 비중이 크지는 않다. 하지만 몇 차례 안 되는 소아 진료에 어른 진료보다 몇 배의 노력과 시간과 에너지를 소비한다는 느낌이 든다.” -110쪽, 〈아이들은 원래 갑자기 아프다〉 중
“응급치료를 했다가 범죄행의로 처벌받은 사례는 거의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협의임을 입증하기 위해 경찰서를 오가거나 법적 공방을 하게 되는 것 자체가 심적, 금전적, 시간적 손해를 떠안게 되는 문제가 있다 ...... 물론 언제든 어느 때든 의사나 구조자를 찾는 간절하고 애타는 목소리가 들린다면, 내 몸은 이런 법조항을 떠올릴 겨를도 없이 먼저 반응할 것이다. 나는 의사이기 때문이다. 아니, 그 이전에 나는 성숙한 시민사회의 일원이기 때문이다.” -237쪽, 〈선한 사마리아 인을 위하여〉 중
이른바 ‘의정 갈등’이 끝 간 데를 모르고 있습니다. 서로의 생각과 사정에 대한 소통과 공감이 절실한 때입니다. 특히나 일선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구체적이고 생생한 이야기에 귀 기울여야 할 필요가 있을 겁니다.
그런 가운데, ‘별반 돈이 안 되는’ 진료 현장에서 20여 년간 묵묵히 일해 온 한 전문의가 그동안 경험하고 생각한 것들을 책으로 써 세상에 내놓았습니다. 인천국제공항 의료센터장 신호철의 에세이집 《공항으로 간 낭만 의사》입니다.
‘인천공항 의료센터’는 아마도 대부분의 독자들에게 생소한 곳일 겁니다. 하지만 연간 약 7,000만 여행객이 이용하고 7만여 상근자가 일하고 있으며, 종합병원이 있는 도심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섬에 위치한 국제공항의 의료기관인 만큼, 공익적으로 꼭 필요한 곳이지요. 한편 이곳은 들뜬 해외여행객부터 고단한 공항근로자까지, 외국인 관광객부터 이주 노동자까지, 출장 기업인부터 상주 노숙인까지 각양각색 남녀노소의 질병뿐만 아니라, 언제 일어날지 모르는 비상상황의 의료적 사태와 고도 10km 상공에서 운항 중인 항공기 내의 발생 환자까지 관리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저자는 그처럼 ‘버라이어티’하고도 공익적인 진료 현장에서 20여 년 일하며 보고 듣고 겪고 생각한 것들을 차근차근 책 속에 풀어놓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 이야기들 속에 어떠한 정치적 견해나 이권 지향적인 속내도 비치지 않습니다. 그저 의업의 본질에 대한 생각과, 의사의 본분을 수행하면서 느끼는 조건과 상황의 문제만을 담담히 말하고 있을 뿐이지요,
오랫동안 진료 현장을 지켜온 이의 이러한 태도와 생각이 오히려 극한으로 치닫는 ‘의정 갈등’을 푸는 단초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모든 문제의 해결은, 표피적 현상이 아니라 본질에 대한 진지하고도 구체적인 성찰에서 비롯하는 것이니까요.
2. 청소년과 청년들에게 권하는 직업 이야기
“퇴근 무렵이면 몸이 곤죽이 되었다. ‘오늘 하루도 무사히 지나갔다’는 안도감이 유일한 위안이었다. ...... 누가 시키는 일이었다면 아마 튕겨나갔을지도 모른다. 내 마음이 그리로 움직였기에 자꾸만 스스로 문제를 내고 그걸 풀려고 애를 썼을 것이다.” -25쪽, 〈‘빨간 전화’를 받는 가정의학 전문의〉 중에서
살다 보면 수많은 갈림길을 마주하게 된다. 어디로 가는 것이 좋을지는 선택의 시점에서는 알 방법이 없다. 그것은 아마도 신의 영역일 것이다. 그때 마음을 다시 잡고 이 길을 계속 걸어온 나의 선택이 그저 옳았기를 바랄 뿐이다. _ 43쪽 〈출근길 새벽에 바치는 인사〉 중에서
“내 영어 실력은 발령 초기에 진료실에서 그 한계를 여실히 드러냈다...... 환자의 말을 잘 못 알아듣는다고 진료를 대충 할 수도 없는 일이니 시간도 많이 걸렸다. 그러다 보니 외국인 승객들에 대한 공포심이 점차 쌓여 갔다 ...... 그러나 부끄러움은 새로운 시작의 원동력이라 하지 않는가!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부족한 영어 실력의 반쪽을 채우기로 결심했다.” -244쪽, 〈공항 ‘닥터’의 영어 울렁증〉 중에서
2023년 교육부와 한국직업능력연구원이 발표한 ‘초중등 진로교육 현황조사’ 결과를 들여다보면, 우리나라 어린이와 청소년의 희망직업은 학령이 올라갈수록 순위가 현실적으로 변화하지만 대체로 ‘전문직종’의 범주 내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어느 정도 진로의 방향이 잡히고 자신의 능력과 적성에 대한 인식이 훨씬 더 현실적인 대학생이 되면, 직업보다는 직장이 화두로 떠오르면서 공기업과 대기업을 ‘목표’로 삼게 되지요. 그와는 별개로 ‘공부깨나’ 하는 아이들은 초등학생 때부터 ‘의대반’ 열풍에 휩쓸리는 게 우리 사회의 현실입니다.
소위 ‘금수저’가 아니고서야 이 ‘정글자본주의’ 사회에서 ‘안정과 고소득’을 추구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현상이겠지만, 아쉬운 것은 ‘어떤’보다 ‘무엇’이, 과정보다 목표가, 일의 즐거움보다는 벌이의 효용이 중시되는 현실이 아닌가 싶습니다.
사회통념적으로 볼 때, 이 책의 저자는 ‘대단히 성공한’ 사람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대표적 ‘고소득 전문직’인 의사인데다가, 그중에서도 전문직인 ‘항공 의학’ 전문가이니까요. 그런데 책을 찬찬히 읽어보면 저자가 도달한 자리는 오늘을 미루고 치열하게 추구했던 내일의 목표가 아니라, 오늘 하루 하고픈 일을 성실하게 꾸준히 하며 지내온 과정의 ‘결과’임을 알 수 있습니다.
소개글에 쓰인 것처럼 “‘인류에 봉사’하겠다고 의학에 입문하지는 않았으나 일하다 보니 ‘인류를 사랑’하게 되었고, ‘안정된 전문직’을 얻으려 의사가 되지는 않았으나 일하다 보니 항공 의학 전문가라는 ‘전문직 중의 전문직’을 갖게 되었”으며, “힘들어 이직하려 했지만 절반은 운명, 절반은 의리로 눌러앉게 되어, 하다 보니 누구보다 일터를 사랑하는 의료센터장으로 20년째 근무해 오고 있”으니 말이지요. 의대에 들어간 것도, 학생운동을 한 것도, 제적을 당했다가 사면복권 후 복학을 한 것도, 몸짱에 배드민턴 동호인 A조 선수가 된 것도, 〈유 퀴즈〉에 출연한 것도, 이 책을 쓰게 된 것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여기에 문제의식을 느끼고, 마음이 움직이는 대로 주어진 본분을 성심껏 수행‘하다 보니’.
‘하다 보니’는 사실, 성공한(했다고 여겨지는) 사람이건 아니건 대개의 기성세대가 다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특출난 ‘위인’이나 지독한 ‘야심가’가 아니라면 대부분은, 특별히 ‘큰 꿈’을 품고 미래를 위한 ‘초인적 노력’을 경주하며 살지는 않으니까요. 그저 열심히 ‘하다 보니’에 ‘칭찬과 인정욕구’가 얼마나 원동력으로 작동하느냐에 따라 조금씩 성취와 보람의 차이가 있을 뿐이겠지요.
그러고 보면 스스로 불행하다고 느끼는 사람 말고는, 기성세대 대부분이 이 책 끄트머리의 문장처럼 “이만하면 잘 살고 있”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한때 의과대학 유급생“이었던 저자처럼, 한때 어떤 실패의 경험을 갖고 있다 하더라도 말이지요. 그렇다면 이 책은 ‘안정’을 희구하면서도 동시에 ‘대박’을 꿈꾸는, 이 불확실하고 모순적인 시대에 청소년과 청년들에게 권할 만한 직업 이야기라 할 만도 하겠습니다. ‘하다 보면 점점 나아지니 내일을 위해 오늘을 유보하지 말라. 불확실한 미래에 집착하기보다는 확실한 지금 여기의 과제에 집중하라’고 말해 주는.
3. 7,000만 항공 여행자들의 건강 여행 안내서
“기내에서 ➀이륙 후 시계를 도착지 시간으로 맞추고 활동합니다. 도착지 시간이 밤이면 기내에서 활동을 줄이고 안대를 착용하고 수면을 취하는 것이 좋습니다. ➁ 충분한 수분을 섭취하세요. 피로의 가장 큰 원인 중 하나는 탈수입니다. 기내에서 과도한 알코올과 카페인의 섭취는 탈수를 일으켜 시차 증후군을 악화시키므로 가급적 삼가는 것이 좋습니다.” -162쪽, ‘시차 증후군 예방을 위한 안내 사항’ 중에서
“단시간 작용하는 신경안정제를 처방받아 단거리 노선을 타는 연습을 하고, 익숙해지면 장거리 여행에 도전해 보세요. 나중에는 약을 먹지 않고 그냥 가지고만 있어도 큰 공포심 없이 편안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177쪽, ‘공황장애와 비행공포증이 두려운 분께’ 중에서
한국공항공사의 통계자료에 따르면 2023년 항공편 이용 승객은 출발 도착 합하여 국제선 약 6,900만 명, 국내선을 포함하면 약 1억 3,360만 명에 이릅니다. 왕복 이용 승객 수로 단순 환산하여도 우리나라 총인구를 훌쩍 넘는 약 7,000만 명이 항공 여행을 한 셈입니다. 이 숫자는 코로나 펜데믹 이후 점차 늘어나고 있습니다. 이는 항공 여행 시의 안전과 건강 문제가 온 국민의 관심사일 수 있다는 뜻이며, 공항과 운행 중인 여객기 내에서 의료적 문제 상황이 생길 가능성이 그만큼 커지고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 책은 ‘7,000만 항공 여행 시대’에 여행자들에게 꼭 필요한 의료정보를 꼼꼼히 짚어 주는 ‘건강 여행 안내서’입니다.
‘공항 병원’ 20년 경력의 저자가 전하는 건강 여행 안내는 그저 이런저런 경우에는 이런저런 점들을 유의하라는 데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고단한 오후 식재료를 썰다가 손에 자상을 입은 공항 음식점 직원이 조금이라도 쉬라고 남들 눈에 띄도록 커다랗게 붕대를 감아 줄 만큼 섬세한 성정처럼, 저자는 자신이 알고 있는 항공 의학의 지식과 정보를 꼼꼼하고 성실하면서도 따뜻하고 자상하여 풀어주어 생소한데도 왠지 친숙한 듯 마음까지도 편안해지게 해 줍니다.
4. 화려한 공항의 뒤편, 보이지 않는 사람들에게 전하는 연대와 응원의 메시지
“출퇴근하면서 이 구역을 지날 때마다 노숙인들을 유심히 보곤 한다. 전과 비교해 행동이나 움직임에 특별한 이상 징후가 있는지를 살피는 것이다. 공항에 살다시피 하는 노숙인들은 건강에 문제가 생기면 어차피 공항 의료센터로 오게 된다. 그러니 나에겐 그들이 언젠가 진료실에서 만나게 될 예비 환자이기 때문이다.” -200쪽, 〈보이지 않는 사람들〉 중에서
“처방된 약을 잘 복용하지 않고 오는 환자분들에게 종종 나의 약상자를 보여주며 웃으면서 말한다. “저도 매일 약을 먹어야 하는 환자랍니다.” 그리고 불편하고 힘들지만 같이 노력해 보자는 다짐도 조금 더 공고히 해 본다.“ -271쪽, 〈아프십니까? 저도 아프답니다〉 중에서
”부끄러움은 반성으로 이어졌고 반성은 새로운 시작의 거름이 되었다. 그때까지 머릿속에 가지고 있던 질병 예방과 생활습관 교정에 대한 지식들을 하나하나 꺼내 다시 분석하고 재정비하기 시작했다. 공항 상주 직원들의 직종별, 나이별, 성별로 가장 많이 문제가 되는 질환들에 대한 자료들을 좀 더 현실성 있게 살피기 시작한 것이다. 천편일률적인 상담과 충고로는 상주 직원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그들의 행동을 교정하고 질병을 예방하거나 치료를 이어 나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인천공항은 조종사와 승무원 등 운항 관련 인력들부터 환경미화원, 하역노동자, 보안 요원 등 공항의 여러 시설들과 시스템을 유지 관리하는 7만여 근로자들, 그리고 공항터미널에서 상주하는 노숙인들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들뜬 여행객들 사이에서 삶을 이어가는 일상의 터전이기도 합니다. 인천공항 의료센터는 여행객 외에 이들 공항 식구들 모두의 건강을 관리하는 의료기관이지요.
오랜 세월 공항 사람들의 주치의 역할을 해 온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이들, 공항을 받치는 이들의 건강을 염려하고 노고를 응원하는 연대의 메시지를 보내고 있습니다.
이들을 바라보는 저자의 시선은 다정하면서도 믿음직스럽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터미널 노숙인들까지도 ‘예비 환자’로 보고 건강 상태를 예의주시하는, 의사로서의 철저한 직업정신과 그 자신이 치료약을 상복해야 하는 지병 환자로서 환자에 대해 갖게 된 공감과 동료의식, 그리고 스스로의 안일함을 수시로 깨닫고 부끄러워하며 고쳐나가 조금씩 더 나은 의사가 되고자 하는 진정성 있는 인정욕구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5. ‘꿀물 타기 좋은 온도’를 알려주는 역지사지 ‘낭만 의사’의 이야기
이제까지 풀어놓은, 이 책과 저자의 모든 덕목은 책 속의 다음과 같은 문장들로 요약된다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구급차를 타고 응급출동을 할 때도, 의료센터에 실려 오는 응급환자를 진료할 때도 반드시 이 세 단어를 되뇐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흔들림 없이 ‘신속’하고 ‘정확’하게 환자의 상태를 판단하되 평정심을 유지하고 ‘질서’ 있게 환자를 회복시킨다는 다짐이다. 세월이 흐른 지금은 단어 하나가 추가되었다. ‘이왕이면 친절. -38쪽 〈신속, 정확, 질서! 이왕이면 친절!〉 중에서
의사로서 나의 지론 중 하나는 의사도 좀 아파 봐야 한다는 것이다. 조금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아픈 사람들을 상대해야 하는 게 의사의 숙명이다. 그렇다면 의사 자신도 좀 아픈 곳이 있고 질병으로 고생을 해 봐야 아픈 사람들의 호소에 좀 더 공감하고 귀를 기울일 수 있지 않을까. -267쪽 〈아프십니까? 저도 아프답니다〉 중에서
“환자분, 목이 많이 부었네요. 이럴 때는 너무 뜨거운 물이나 찬물은 인후에 자극이 될 수도 있으니 미온수를 조금씩 자주 마시는 게 좋습니다. 집에 혹시 꿀이 있으시면 꿀물을 드시면 좋은데 혹시 꿀물 타기 좋은 온도는 아시는지요?” 환자분에게 가벼운 질문을 던지며 슬며시 내 뒤에 앉아 있는 전공의를 바라본다. 그의 눈동자는 답을 모른다고 말하고 있다. 의학 교과서에 꿀물 타기 좋은 물의 온도가 나와 있을리 만무하니까. ..... 의사의 설명과 교육은 교과서처럼 정확해야 하지만 환자의 일상생활에 맞게 구체적이고 풍부하고 현실적이어야 한다 -301쪽 〈닫는 글 - 어느 전공의의 편지〉 중에서
의사, 법관, 교수,.. 소위 ‘고소득 전문직’을 가진 많은 사람들이 ‘의醫’와 ‘법法’과 ‘교敎’에 충실하기보다는 ‘사師’와 ‘관官’과 ‘수授’ 같은 표면적 지위에 집착하는 세상에서, 늘 자기 일의 본질을 돌아보며 하루하루 충실하고자 하는, 예사로워야 하나 예사롭지 않은 직업인의 모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