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한 몸을 보더라도 어째서 ‘묵묵(默默)’이 이처럼 많단 말인가? 묵묵에서 나고, 묵묵에서 자라고, 묵묵에서 늙어 가니, 외롭고 쓸쓸한 나의 옛 모습은 할 말이 없어 앉아 있고, 버쩍 야위어서 피골이 상접〔鳴骨〕하여 말이 없어도 행하니, 집안사람들이 묵묵옹(默默翁)이라 일컬어 동네 사람들도 묵묵옹으로 부른다. 물에서 낚시하니, 묵묵어옹(默默漁翁)이라 부르고, 산에서 나무를 하니 묵묵초옹(默默樵翁)이라 부른다. 묵묵이 천지자연〔乾坤〕이고, 가는 곳마다 묵묵이 아닌 것이 없기에 나의 자호(自號)는 묵묵옹(默默翁)이다.
오호라! 묵묵의 뜻이 어찌 어지러운 바가 없겠는가.
-지은이 김기호 선생의 「묵묵옹 자서」 중에서
아버지는 타고난 자질이 총명하여 일찍이 학문에 뜻을 두어 오래도록 연구하여 쌓은 지식이 이미 깊고, 효도와 우애로써 집안을 바로 세워 훌륭한 계책을 후세에 남겼다. 의지와 기개가 호방하고 웅대하여 위태로움을 보면 정의를 위해 나섰으며, 힘들게도 학교를 설립하여 후생을 계도하였다. 불초함을 돌아보며 당일에 자식으로서의 직분에 몸을 바칠 수 없어 세상에 부쳐 살기만 하니 그 덕행의 만에 하나도 본받지 못하고, 세상의 흐름에 떠다니기만 하여 집안의 평판을 실추시켰으니 이보다 더 큰 죄가 없도다. 소자 이제 대를 이어온 마을을 떠나 마산에 와서 살면서 지난 일〔往㤼〕을 추억해 보니 풍수(風樹)의 슬픔을 더욱 금할 수 없다.
-아들 김화산 님의 「가장(家狀)」 중에서
73년 전 할아버지는 문집 발간을 염두에 두고 묵묵옹 자서를 남겼습니다. 아버지께서도 할아버지의 뜻을 헤아려 초고를 정리하고 가장을 쓰셨지만, 그 결실을 보지 못하고 할아버지를 따라가셨습니다. 세월은 흘러 어느덧 제 나이 일흔을 넘겼습니다. 더 미룰 수 없어 번역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
할아버지의 시와 산문을 읽고 우리말로 옮기면서 할아버지께서는 행동하는 시인이요, 지성이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구용(九容)과 구사(九思)를 학문의 요결로 삼아 대학과 중용, 역경을 상고하면서 경서의 가르침을 배우고 익혔습니다. 문리를 터득하여 사물의 이치를 꿰뚫어 보는 눈을 가졌습니다. 문학을 통해 성정을 바로잡고 사회의 혼탁함을 경계하면서 사상과 철학, 윤리관을 풀어나갔습니다. (…) 일제 탄압의 엄혹한 시기를 살면서 자신의 꿈과 포부를 펼치기 위해 지사적 삶을 도모하면서 범처럼 높은 기상을 따르려는 의지를 보이고, 학처럼 고고한 풍모를 보이기도 하였습니다.
-손자 김복근의 「옮긴이의 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