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움의 거장이 전하는 불멸의 예술
중학교 2학년 때 한 다방을 빌려 생애 최초 개인전을 열며 화가의 꿈을 키워온 김병종 화백. 40년 이상 화업을 이어가고 있지만 그의 붓은 지금도 멈추지 않는다. 가로 55미터에 달하는 대작을 그릴 정도로 열정 넘치는 예술 인생을 살아가는 그에게도 슬럼프는 있었다. 한 발짝도 앞으로 뗄 수 없을 듯한 어둠과 절망의 터널을 지나며 다시 한번 생의 르네상스를 열고 싶다는 간절함을 품는다. 그러한 마음을 안고 이탈리아로 여행을 떠난다. 그 누구도 아닌 자신을 위해 이탈리아를 누비며 눈길 머무는 곳, 발길이 닿는 곳을 시와 산문, 그림으로 남겨둔다. 언제든 미의 제국 이탈리아를 거닐던 그때로 다시 돌아갈 수 있도록.
세계 최대 규모로 미켈란젤로와 라파엘로의 대작을 만날 수 있는 바티칸미술관, 겉보기엔 소박하지만 메디치 가문이 수집한 최고의 걸작이 가득한 우피치미술관, 고대 로마 미술의 학습장이라고 할 만한 카피톨리니박물관, 미켈란젤로의 모세상을 만나는 산피에트로 인 빈콜리 성당, 천국의 상상도 같은 피렌체 두오모 대성당의 돔, 세월의 풍파 속에서 살아남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이 남아 있는 산타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성당 등 이탈리아에는 볼 것도 많고 갈 곳도 많다. 한 시대를 풍미한 천재들이 남긴 작품들을 김병종 화백만의 사유와 함께 만나다보면 시공을 넘어 그들의 맥박 소리와 숨소리까지 생생해진다.
가끔 누구도 알 리 없는 나만의 여행이 지닌 그 확장성에 홀로 겨워 한다. 낯선 지도 위를 걸으면서 차창의 공기처럼 뺨을 때리고 지나가는, 평생으로라도 바꾸고 싶지 않은 순간의 느낌들. 고유한 원초적 생명체로 서 있는 것 같은 자아와 그것을 둘러싼 행복한 흥분. 세계관과 시야가 넓어지며 알을 깨고 나오는 것 같은 그 황홀과 공포. 그리고 그것을 기록하는 밤과 새벽의 시간들. 힘들게 돌아와 다시 가방을 꾸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_158쪽
힘차게 울려퍼지는 생명의 노래
로마, 피렌체, 밀라노 등 도시를 거친 이탈리아 예술 기행은 낯선 땅에서 일상을 경험하며 마무리된다. 시야가 흐려질 나이가, 만남보다는 헤어짐이 익숙한 시기가 누구에게나 찾아온다. 인생의 마지막 이탈리아 여행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김병종 화백의 발길은 자꾸만 분주해진다. 미켈란젤로나 레오나르도 다빈치, 라파엘로, 카라바조 같은 작가들이 남긴 빼어난 작품만 감상하기에도 시간이 부족하다. 그러나 바쁠수록 돌아가는 법. 이번에는 이탈리아 남부 작은 도시에 잠시 머물며 자연과 하나되는 시간을 갖는다.
산책과 스케치, 글쓰기를 되풀이하는 단조로운 생활 속에서 도리어 내면은 창조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 채워진다. 끝없는 소음과 분노와 갈등으로 가득한 땅을 떠나 적막과 고요, 그리고 평화로운 처소에 머무는 비어 있음의 시간. 그런 시간을 보내며 그 어떤 예술작품보다도 아름다운 야생의 생명력과 여유를 발견하게 된다. 괴테나 니체를 비롯한 수많은 지성이 이곳 이탈리아에서 영감을 얻고 돌아가곤 했다. 예술가들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걸출한 예술 작품뿐 아니라 콜로세움이나 피렌체 대성당 같은 건축물 등 사람이 만든 이 세상 모든 아름다움을 만날 수 있는 이곳에서 꿈결 같은 시간을 보낸 김병종 화백은 다시 한번 현역 화가로서 힘찬 걸음을 내딛는다.
좋은 여행이 되기 위한 세 가지 조건이 있다고 한다. 동반자가 좋을 것, 가방이 가벼울 것, 돌아올 집이 있을 것. 여행하기 좋은 ‘때’에 대한 조건도 있다. 다리 떨리기 전, 가슴이 떨릴 때. 화가인 내 입장에서는 그 우선 순위가 바뀐다. ‘시야가 흐려지기 전에 떠난다’이다. 시야가 흐려져서 색채가 뿌얘지고 형태가 흔들리기 전에 볼 것. 가슴이 떨리는가는 그다음 문제다._10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