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과 문자로 이어지는
영원불멸한 문학의 힘
“한 우물만 파라”며 주변에서 끊임없이 잔소리를 해도 40년 이상 그림과 글을 병행해온 김병종 화백에게 이번 더블린 여행은 남다른 의미를 갖는다. 화가의 그림과 그림 속 배경을 찾아나선 그간의 예술 기행과 달리 이번 여정은 오랫동안 흠모해온 작가들의 발자취를 따르는, 글이라는 세계로 떠나는 영혼의 성지순례다. 청년 시절 이후 줄곧 연모해온 C. S. 루이스를 비롯해 『율리시스』나 『더블린 사람들』로 더블린 문학의 맹주로 자리잡은 제임스 조이스, 지금도 추모의 행렬이 이어지는 문단의 영원한 셀럽 오스카 와일드, 아일랜드 대자연에 흐르는 빛과 색을 언어로 잡아올린 윌리엄 예이츠 등이 남은 흔적을 더듬으며 인생은 저물더라도 ‘문학’만은 시공을 뛰어넘어 영원함을 느낀다.
여러 작가들의 흔적뿐 아니라 문화에 목말랐던 옛 시절 자신과도 만난다. 닥치는 대로 책을 읽었지만 늘 책 가난에 허덕였던 그 옛날의 소년으로 돌아가 트리니티칼리지 도서관 롱룸 앞에 서는가 하면 자신의 작품이 무대에 올려졌을 때 설렘과 흥분을 느꼈던 이십대 청년으로 애비극장 앞에 서기도 한다. 40년 넘게 이어온 예술 인생의 과거와 현재를 이으며 김병종 화백은 꺼지지 않은 예술을 향한 열정을 더블린 여행에서 발견한다.
이제야 알겠다. 이 작은 섬나라에서 왜 그토록 많은 사람이 글 쓰는 쪽으로 흘러갔는지를. 흐린 날 호수와 야트막한 목초지, 지는 석양 속으로 차를 달리다보면 누구라도 시인이 되어 있음을 느낄 것이다. 도대체 언어라는 포충망으로 잡아채지 않는다면 순간순간 풍경 속으로 흘러가는 그 느낌을 어떻게 표현한다는 말인가. 나 역시, 스쳐가는 한나절 동안의 풍경을 몇 장의 드로잉으로 붙잡기는 어렵다. 이곳에서 글을 쓰는 이유다. _124쪽
신이 인간에게 내려준
휴식과 영혼의 땅
아일랜드는 글의 힘만 강한 나라가 아니다. 음악과 자연이라는 매력도 빼놓을 수 없다. 판소리 동편제의 탯자리로 불리는 남원에서 자란 김병종 화백에게 아일랜드 음악은 남도의 창처럼 익숙하게 다가온다. 내전을 겪고 오랫동안 잉글랜드와 갈등해온 아일랜드인들은 문자로 풀어내지 못한 곡절 많은 감정을 음악에 담아낸다. 영화 〈원스〉에서처럼 길거리 버스킹 공연이 활발히 이루어지고, 곳곳에 자리한 펍과 바에서 음악이 흘러나오는 더블린의 골목을 거닐며 김병종 화백은 음악의 물줄기가 삶의 온갖 서사와 합하고 흩어지는 감미로운 풍경에 젖어든다.
때로는 압도적이고 장엄한 자연 앞에서 잠시 언어를 잃기도 한다. 더블린을 벗어나 모허 절벽, 던 앵거스 절벽, 앤트림, 브루 너 보너 등을 돌아보며 인간에게 주어진 시간의 유한성을 느끼며 도리어 안도하기도 한다. 한 세기를 버틸까 말까 한 인생들의 희로애락이 자연 앞에서는 그저 애처롭게만 느껴질 따름이다. 원시의 자연을 닮은 듯한 풍경, 독특한 도시적 섬세함과 세련성이 어우러진 풍경을 오가며 한 장의 그림으로 압축할 수 없는, 아일랜드만의 웅혼한 혼을 느낀다.
땅이 어떻게 식물을 기르는지 하늘은 어떻게 빛과 공기를 품는지 공기는 어떻게 새들을 품는지 같은 사물의 이치와 현상에 시선과 생각이 머무르는 곳. 기다림, 인내, 영혼 같은 잊었던 단어를 떠올리며 마냥 게으르게 한껏 느리게 살아도 될 것 같은 곳. 아일랜드의 대기에는 어떤 근원적이면서도 영적인 분자 같은 것이 녹아 있어서 시간을 부풀리거나 팽창시키는 듯하다. _5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