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에서 2020년대까지,
서평과 칼럼, 인터뷰와 부고 기사로 읽는 한국문학 총결산
1992년 〈한겨레〉의 문학 담당 기자가 된 이래 서른 해 넘게 현역으로 활동해온 저자는 그 시간들을 더할 나위 없는 행운이었다고 회고한다. 작가와 문학의 사회적 지위가 막강했던 시절이 생생한 그에게 한국문학은 어떻게 가름될까. 문학의 융성과 쇠퇴를 현장에서 체감한 이로서, 그 면면을 기록해야 한다는 기자로서의 의무감 또한 있었음을 이 책은 짐작케 한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라는 걸출한 작품을 남겼으나 끝내 침묵하다가 타계한 조세희 선생과의 인연, 한국문학계의 따사로운 어른 박완서 선생 추모의 글, 〈한겨레〉 기자 출신 소설가 김소진의 작품에 나타난 기자들의 모습까지 세세히 일별한다는 점이 그렇다. 또한 요절한 시인 진이정의 유고 시집론, 지난한 역사를 해원하는 형식으로서 문학적 의미를 조명한 황석영의 《손님》론, 안도현의 시선집에 수록한 해설까지, 작가와 작품에 대한 본격적인 비평을 선보인다.
유럽어에 (암묵적으로) 한정되어 번역의 한계를 뛰어넘어야 하는 노벨문학상 비판론, 신경숙 표절 사태를 통해 드러난 문단 카르텔, 역사의식으로 포장된 무라카미 하루키의 역사허무주의에 대한 일침 등 핵심 쟁점에 관한 글들도 문제적이다.
시간순으로 정렬한 칼럼과 서평을 통해서는 역사와 시대를 관통하는 키워드를 살필 수 있다. 평양에서 열린 남북민족작가회의 풍경, 비폭력을 외친 시인을 진압하는 세태, 코로나 시대의 문학, 기후위기 시대, 오토픽션 논란으로 촉발된 소설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생각 등이 그것이다. 김소진의 첫 소설집부터 김연수, 김애란, 한강, 최은영을 거쳐 김초엽의 신작까지, 한국문학의 거듭된 성취를 가늠해볼 장을 제공한다.
특히 별면 인터뷰와 문인들의 부고 기사는 그 자체로 한국문학사의 큰 줄기를 대변한다. 박경리, 이청준, 박완서, 최인호, 최인훈, 허수경, 김지하 등의 부고는 한 시대의 시작과 끝을 알리는 엄숙하고 비장한 문학적 풍경들이다. 그 풍경을 조감함으로써 “그가 멈춘 곳에서, 그를 잃고서, 그러나 그와 함께” 새롭게 시작될 한국문학의 미래 또한 기대할 수 있다.
그러나 김소진 문학은 어디까지나 생성 중이었다.
《열린 사회와 그 적들》 《고아떤 뺑덕어멈》 《자전거 도둑》 등 세 권의 단편집, 장편 《장석조네 사람들》과 《양파》, 콩트집 《바람 부는 쪽으로 가라》, 장편동화 《열한 살의 푸른 바다》로 갈무리된, 그리고 반쪽짜리 장편 《동물원》을 남겨둔 그의 문학은 미완의 상태에서 급정거했다. 작가로서 그가 성취한 바는 앞으로 성취할 바에 턱없이 미치지 못하는 것이었다. 점입가경, 그의 이야기는 바야흐로 흥미진진한 본론으로 접어들 참이었다. 그는 독자와 더불어 90년대를 넘어 21세기로 나아가야 했다.
그가 멈춘 곳에서, 그를 잃고서, 그러나 그와 함께, 세기말의 한국 소설은 새롭게 시작할 것이다._김소진의 부고, 333쪽
인간은 이야기의 우주 속에 태어나 살아간다
문학의 본령을 꿰뚫는 한 기자의 묵직한 통찰
저자는 1988년 한겨레신문사에 입사해 2022년 정년퇴직을 하기까지, 신문사가 유일한 직장이자 평생직장이었다. 문학의 영토 안에서 작가와 독자를 잇는 가교인 기자로서의 본분에 사력을 다했을 것이다. 추문과 비아냥 속에서 한국문학이 길을 잃었을 때도 우리는 왜 소설을 쓰고 읽어야 하는지 작고한 평론가 김현의 말을 되새기면서 끝까지 지켜보았을 것이다. “이 세계는 과연 살 만한 세계인가, 우리는 그런 질문을 던지기 위해 소설을 읽는다”(224쪽). 소설은 비록 더럽고 비참한 상황을 그리더라도 그 안에는 유토피아를 향한 소망이 오롯이 간직되어 있어야 한다고 저자는 힘주어 말한다. 문학과 문학이 향해야 하는 바에 대한 신뢰와 애정이 굳건했던 한 기자의 묵직하고도 날카로운 통찰이 《이야기는 오래 산다》에 남아 독자에게 면면히 이어지길 바라본다.
이 책에서도 소개한 나의 스승 도정일 선생의 인문 에세이에 따르면, 인간이란 이야기의 우주 속에 태어나 살아가는 동물, “이야기하는 원숭이”다. 이야기는 의미 없는 세계에 의미를 부여하는 행위이고, 그런 이야기를 대표하는 것이 바로 문학이다. 문학사가 쓰이기 전에도 문학은 엄연히 존재해왔다. 내가 문학 기자를 하기 전에도 면면히 이어졌듯이, 나의 퇴직 이후에도 이야기는, 문학은 오래도록 살아갈 것이다. 이 책이 문학의 그런 유구한 생명력에 대한 하나의 증거가 되기를 바란다. _‘책머리에’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