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모든 연령층의 국민을 대상으로 한 해외여행 전면 자유화와 1991년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을 기점으로 한국 사회가 급속하게 글로벌 사회에 편입되기 시작한 지 어느덧 30여 년의 시간이 흘렀다. 이제 연휴 때마다 공항이 여행객으로 북새통을 이루고, 외국의 거리나 식당에서 같은 한국인을 마주치는 일은 더 이상 신기하거나 낯설지 않다. TV에서는 외국인 출연자들이 능숙한 한국말로 농담을 주고받고, 우리의 음악, 드라마, 영화, 음식, 심지어 미용 관리법까지 알파벳 ‘K"가 붙은 채 세계 시민들의 일상 곳곳을 파고든다. 한 해 외국인 입국자가 천만 명, 한국인 해외여행객이 이천만 명을 훌쩍 뛰어넘는 오늘의 우리는 그야말로 글로벌 시대의 입구를 지나 그 한가운데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렇듯 우리의 상상력과 활동 반경은 삼면이 바다로 가로막힌 지리적 조건과 분단이라는 지정학적 장벽을 뛰어넘어 좁은 반도의 경계를 벗어난 지 오래다. 하지만 우리네 대다수 장삼이사에게는 아직 선뜻 엄두가 나지 않는 영역이 있으니, 바로 외국에서 일자리와 터전을 잡고 살아가는 것이다. 언어 장벽과 낯선 문화, 차별 등에 대한 두려움도 두려움이거니와, 일단 어디서부터 무엇을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 좀체 머릿속에 그려지지 않기 때문이다. 하물며 유엔 산하의 국제기구에 들어가 일한다는 것은 더더욱 그러하다.
『나의 글로벌 직장 일기』는 그렇게 막연하고 구현하기 힘든 상상을 실제 삶으로 살아낸 한 인물의 자전적 기록이다. 저자는 1990년대 말 유엔의 교육 담당 전문기구인 유네스코(UNESCO)에 과장으로 입사해 한국인 여성으로는 최초로 유네스코 국장 자리에까지 올라 아프리카의 준지역사무소 소장, 평화지속가능발전 교육국 국장, 유네스코 국제직업기술교육센터 책임자 역할까지 두루 거쳤다.
이러한 이력을 바탕으로 저자는 “우연히 국제기구에 들어가게 된 사람이 글로벌 무대에서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국제적인 활동에 대해 사람들이 갖고 있는 로망과 마주쳐야 하는 진실에는 어떤 온도 차가 있는지”를 실제 경험에 비추어 담담하면서도 생생하게 풀어낸다. 실제로 저자가 경험한 국제기구 직원의 일터는 일반적인 환상과는 달리 국제기구 간의 “밥그릇 싸움이 그렇게 치열하다는” 사실에 실망하기도 하고, “화내고, 토하고, 설사하고, 왕만두 못 먹겠다고 소리치는” 컨설턴트들을 상대하거나, 때로는 무시무시한 협박 편지도 감수해야 하는 “극한 직업”의 현장이다. 그와 동시에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지향하는 방식으로 국제 개발 사업을 진행하는 모범적인 국가들의 모습을 직접 지켜보고, “리더의 밥상에 올라온 외로움이라는 반찬”을 혼자 꾸역꾸역 먹으면서도 좀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가겠다는 꿈을 향해 묵묵히 나아가는 공간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대목에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이 책은 단순히 한 엘리트 여성이 유엔 기구에 ‘당당히’ 진출해 세계를 무대로 누비는 활약상이나 경험담을 풀어놓은 평면적인 회고록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보다는 “스스로 날개를 만드는 재주를 갖지 못한” 30대 늦깎이 사회 초년생이 자신을 믿고 관대하게 밀어주는 상사들을 만난 덕분에 “나 먹고살게 해 주는” 직장에 들어간 뒤 23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겪은 일과 사람, 세상을 담담히 풀어낸 삶의 회고이자 독백이라는 편이 정확하다. 터무니없는 비방과 협박을 받고도 “남이 아닌, 나의 손가락이 나를 더 깊게” 찌르는 성찰의 경험과 “뉘엿뉘엿 저무는 해를 뒤로 하고 마티니 한 잔을 마시면서 추리 소설을 읽던” 이웃 할머니가 누렸던 노년의 삶의 여유와 멋을 소망하는 관조적 태도는 『나의 글로벌 직장 일기』와 그 저자가 지닌 가장 큰 미덕이다
국제기구를 비롯해 해외에서 진로를 쌓아가고 싶은 청년들, 인생의 수많은 방향 표지판 앞에서 여전히 혼란스러워하는 사람들, 치열한 삶의 여정을 거쳐 인생 후반길을 정리하는 지혜를 갈구하는 모든 이들에게 이 책의 일독을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