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나타나 꽃을 내밀고
열띤 목소리로 동네를 소개해 준 ‘나의 요스튼’ ”
낯선 곳에서 기대하지 않았던 호의
진심이 담긴 배려로 기억되는 네덜란드의 첫 인상
네덜란드에서 처음 살게 된 작가의 집은 작은 방 창문 밖으로 보이는 드넓은 잔디밭과 나무가 어우러진 풍경이 마음에 들어 빌린 아파트였다. 이사 후 일상을 이어가던 어느 날 아침, 이웃에게 기대하지 못했던 환대를 받게 된다.
“갑자기 눈앞에 나타나 내게 꽃을 내밀고, 큼지막한 지도를 펼쳐 든 채 열띤 목소리로 동네를 소개해 주는 은빛 머리색의 할머니를 보고 있자니, 왠지 마음속에 뭉클한 기운이 솟아나는 것을 느꼈다. 사실 그때까지 이 낯선 동네에서 좀 주눅이 들어 있었나 보다.”
다음 날 친절에 보답하기 위해 화분과 정성껏 준비한 카드를 들고 이웃 할머니 집을 찾았지만, 곧 카드를 잘못 골랐다는 걸 알게 된다. 요스튼 할머니는 실수를 위트 있게 넘기며 작가를 배려해 주었다. 사실 요스튼 할머니는 혼자 살면서 현관문에 대여섯 개의 자물쇠를 달았고, 나중에는 노환으로 쇠약해진 탓에 집을 떠나 요양 병원에서 지내게 된다. 하지만 작가에게는 낯선 곳에서 호의와 배려를 진심으로 보여주었던 이웃으로, 네덜란드는 어떤 곳인지 알려주는 늘 환한 미소의 ‘나의 요스튼’으로 기억되는 것이다.
“내 친구는 살구를 한 번도 먹어본 적이 없대”
늘 똑같은 저녁 메뉴에서 찾아낸
조금 다르지만 평온하고 유연한 삶의 방식
변화가 적은 네덜란드에서의 일상을 보여주는 에피소드 가운데 하나는 식단이 크게 바뀌지 않는 아이 친구 이야기다. 아이는 “내 친구 J는 살구를 한 번도 먹어본 적이 없대”라며, 일주일 동안 먹을 음식을 정해 무한 반복하는 친구 가족들에 대해 신기해하며 말한다. 아이의 친구뿐 아니라 네덜란드 사람만 그런 것도 아니겠지만, 작가는 “오늘 저녁 메뉴가 뭐냐고 물을 수 없어서 아쉬울 수도 있고, 물을 필요가 없어서 편할 수도 있지”라며, “반복되는 익숙함과 편안함, 그 평온함 속에서 굳이 치열해질 필요가 없는 그들만의 무던한 일상”을 들여다보는 것이다.
이렇게 크게 변하지 않는 모습 속에서 작가는 다른 삶의 방식을 발견해 낸다. 저녁 무렵 슈퍼마켓에서 나오는 한 남자의 손에는 냉동 피자가, 옆의 임신한 여자의 손에는 샐러드가 들려 있었고, 그날 저녁 메뉴는 냉동 피자와 샐러드임을 짐작하며 그들의 여유로운 퇴근길을 바라본다.
이들에게 중요한 건 저녁 ‘메뉴’가 아니라 저녁을 먹은 후 보낼 ‘시간’이라는 것이다. “평상시의 저녁 식사 준비를 거창하지 않게 하는 대신, 되도록이면 간단하지만 영양을 갖춘 식사로 배를 채우고”, 이후에는 산책을 하거나 가족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복잡하지 않고, 요란하지 않으며, 누구 하나 혼자 바쁘지 않은 그런 저녁 시간이” 흐르는 삶의 단편인 셈이다.
“같이 성장하고 배워가는, 꽤 괜찮은 경험”
이국에서 가족과 함께하면서
반목과 불안을 밀어내고
다시 다가올 평범한 날들을 위해
모든 부모에게 아이의 교육은 난제일 것이다. 네덜란드의 초등학교 교육은 숙제와 사교육이 없어 학교생활이 편하기도 하지만, 여유를 부리다 경쟁에 뒤처지지는 않을지 걱정과 불안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작가와 같은 동네로 이사 온 부부는 아이들 “교육 때문에” 네덜란드에 머물기로 결정했다고 하며, 아이들이 편하게 학교생활을 할 수 있게 해주고 싶다고 했다. 작가는 이 말의 의미를 공감하는 한편, 네덜란드의 교육 과정에서 중요시하는 것 중에 하나가 ‘말하기’라고 덧붙인다. 자신을 표현하고 발표하는 연습을 꾸준히 함으로써, “많은 양의 지식을 배우지 않아도, 어디를 가서도 자신감 있는 표정과 말투로 당당히 말을 할 수 있”게 된다. 학교에서 말만 하다 온 아이를 반기는 일이 자연스러운 일상이 되고 있다.
“집 앞을 오가다 매번 마주하는 우크라이나 여인들과 그 아이들이 머물고 있는 건물을 보다 보면, 마음이 참 복잡다단해짐을 느끼고는 한다. 처음에는 창문 하나하나에 꼼꼼히 블라인드가 쳐져 있었다. 그 사이로 빛이 새어 나오는 걸 두려워하는 듯 저녁 어스름에 흘러나오는 빛들도 조심스러워 보이던 날들이었다.”
받아들일 수 있는 변화가 있는가 하면, 삶을 불안과 혼란으로 빠뜨리는 위기 상황도 있다. 작가는 수납장 깊숙이 넣어둔 채소 캔을 보며 과거 코로나19로 인한 일상생활의 제한과 커져만 갔던 두려움을 떠올리기도 하고, “전쟁이라는 단어가 내 삶과 매우 가까운 곳에 있을 수도 있다는 걸 처음 실감”한 것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피란한 난민을 받아들여 같은 동네에 그들이 머무는 모습을 보면서였다고 고백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내 불안한 날들을 밀어내기 위해 힘을 낸다. 친구의 자전거가 고장 나 난감해하며 전화를 걸어 온 아이에게 비가 오더라도 친구와 꼭 함께 돌아오라고 격려하고, 아이를 돌보기 위해 고용한 어린 보모가 공부를 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난폭 운전을 하는 버스 기사에게 세워 달라고 요구하기 위해 스스로에게 용기를 불어넣는다. 같을 수도 다를 수도 있지만 분명 모두의 평온하고 평범한 날을 기원하는 응원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