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한국 국립현대미술관의 업무와 위상
이 책은 윤범모 관장이 한국국립현대미술관 관장으로 취임하고 나서 5년 간의 회고록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성격은 단순한 회고록, 혹은 자신의 치적을 과장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첫째 국립현대미술관이 하는 업무와 방향 등을 소상히 정리함으로써 큐레이터 및 장래 미술관 업무를 희망하는 후학들에게 하나의 교과서를 제공하고 있으며, 둘째 현재 얼마나 그 위상이 향상되었는지를 반증함으로써 미술과 미술관이 국가의 위상을 제고하는 데 얼마나 큰 역할을 하는지 보여주고 있으며, 셋째 지난한 관장으로서의 고충을 보여줌으로써 세계 최대 미술관의 수장이 문화 예술에만 전념할 수 없는 한국 사회의 한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윤범모 관장은 취임 당시부터 순탄치 않았다. 좌파 관장이라는 언론의 편파적 보도 때문이었다. 또한 재임 당시에는 정권 교체로 인한 정치적 압력도 격심했다. 그가 좌편향이라 불리게 된 것은 종래의 서구지향적 및 우편향적 미술계 풍토 때문이었으며, 윤 관장 자신이 주장하듯 "새가 좌우 날개로 날 듯이" 균형 감각에 의거했을 뿐이다. 정권이 바뀐다고 문화적인 지향이 바뀔 수는 없는 것이기에 새 정권의 압박은 재임된 관장으로서는 견디기 힘든 것이었다. 윤범모 관장은 자신을 "백조 관장"으로 비유하듯이, 묵묵히 자신의 오랜 현장 경험과 학술적 경험을 바탕으로 목표를 세우고 그것을 실현해 나갔다. 그것은 취임 일성으로 발표한 "협업하는 열린 미술관", " 남북미술 교류 협력", "한국미술의 국제화", "한국미술의 정체성 확립", "4관체제의 특성화 및 어린이미술관 강화", "이웃집 같은 친근한 미술관"이다.
이 책은 윤범모의 전기가 아니다. 하지만 그가 현대미술관 관장으로서 이루어낸 성과가 크다는 것을 무시할 수는 없다. 이러한 성과는 한류라는 세계적인 시류에 잘 올라탄 덕분도 있다. 하지만 코로나라는 미술관으로서는 비극적 상황에서도 그것을 전화위복으로 삼았다. 이러한 길흉화복의 상황에서 최대치의 업적을 이끌어 낸 것은 관장 개인의 치적으로 볼 것이 아니라 후대를 위한 모범사례로 기록해 둘 필요가 있는 것이다.
한국 현대미술사를 정리하고 그것을 영문판으로 출판한 것은 일대기적 사건이다. 또한 "다다익선"의 재가동, 다양한 해외전시, 이건희컬렉션 수증, 코로나 중 "세계 10대 온라인 뮤지엄"으로 선정된 것, 윤범모 관장이 임기 중에 이루어낸 업적은 이루 헤아리기 힘들다. 그가 최초로 재임에 인선된 것도 우연이 아니었던 것이다. 또 임기를 마치기 전에 미술관을 떠나야 했던 것도 한국 사회의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기에 우연이 아니다. 이러한 정치와 맞물린 기관장의 교체 문제는 우리 사회에 경종을 울리는 것으로 이 책을 통해 다시금 문화와 예술이 서야할 자리를 인식하게 한다.
2. 이건희컬렉션의 의미
최근 들어 미술계의 일대 사건은 삼성가의 이건희컬렉션 기증이다. 이미 2년이나 지났지만, 아직도 그 여운은 계속가고 있다. 끊임없이 전시가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건희컬렉션의 대부분을 수증 받은 당시 국립현대미술관장 윤범모 관장의 감회는 이 책에 고스란히 나타나 있다. 나라를 대표하는 현대미술관임에도 불구하고 예산 때문에 한국 화가의 주요 작품이 부재한 현실. 만 점도 채 되지 않는 부족한 작품 수. 세계적 미술관으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부족함이 눈에 보이는 재정적 현실을 단숨에 해결해 준 기적 같은 사건이 한국 사회를 강타한 것이다. 기증 문화가 부재한 한국에서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엄청난 양의 국보급 문화재와 미술품을 여러 박물관에 고루 분배하여 기증한 이건희컬렉션 기증 사건은 미술관을 찾지 않는 많은 시민들을 미술관으로 불러들였다.
"국립 미술관, 그것도 하나밖에 없는 국립 미술관, 소장품은 8,500점 대였다. 미술관 가족은 언제 1만점 시대에 진입하는가, 꿈꾸기에도 바빴다. 하지만 꿈도 여럿이 자주 꾸면 현실이 된다는 말, 정말 좋은 말이지 않을 수 없다. 나는 미술관에서 일하면서 작가, 유족, 소장가들과 만나 좋은 작품의 미술관 기증을 희망했다. 그래서 올해 확보한 새 작품만 해도 500점 대였다. 그동안 미술관에서 한 해에 등재할 수 있는 작품은 200점 정도였다. 그런데, 이 웬 사태인가. 이건희컬렉션 1,500점이 한꺼번에 들어 왔다. 그래서 올해에 수장고에 들어 온 작품 2천 점은 물리적으로 10년어치 업무량이라 할 수 있다. 이에 소장품과는 비상사태임을 실감하면서 행복한 비명을 지르고 있다. ‘소장품 1만 점 시대의 진입!’ 그것도 단숨에 1만점을 돌파하는 행운을 잡았다. 이로서 국립현대미술관은 구입작품보다 기증품의 비중이 더 높아졌다. 경사스럽고 경사스러운 일이지 않을 수 없다. 1,488점의 내역. 한국작가 276명과 외국작가 8명의 작품으로 이루어졌다. 장르별로 보면 회화(서양화) 412점, 한국화 296점, 드로잉 161점, 그 외 판화, 조각, 공예, 사진, 영상 등 다양성을 보이고 있다. 이 가운데 1950년대 이전의 작품은 320점으로 전체의 약 22%를 차지하고 있다. 주요 작가별로 보면, 유영국 187점, 이중섭 104점, 장욱진 60점, 이응노 56점, 박수근 33점, 권진규 24점 등 실로 화려하기 그지없다. 김환기의 점 시리즈 한 점을 제대로 구입하려면 미술관 구입 예산 2‐3년어치를 모아야 가능한 수준인데, 이 어찌 경사가 아닐 것인가. 그래서 김환기의 점 그림 〈산울림〉은 더 소중하다. 기증품 가운데 가장 큰 그림은 김환기의 〈여인들과 항아리〉(1960년경)다. 구상화 절정시기의 김환기 예술세계를 집약한 대표작이다. 평소 김환기가 좋아하는 소재들이 적절하게 배치되어 있다. 이 작품은 속칭 1천호짜리 크기라는 말처럼 대형 캔버스 작품이다. 원래 대기업가의 저택을 장식했다가 매물로 나와 삼성과 인연이 이어졌다. 나는 이 작품을 1980년대초 중앙일보사 신사옥 로비에 걸 때 동참한 바 있는데, 수십 년 만에 다시 풀어보는 행운을 얻었다. 정말 감개무량했다. 호암갤러리(삼성미술관 리움 전신) 개관전 때 실무책임자로 일했던 인연이 이렇게 연결되다니! 하기야 나의 호암 재직 당시 구입했던 작품들 여러 점을 이번 이건희컬렉션 기증품에서 다시 만날 수 있었으니, 이 또한 놀라운 일이지 않을 수 없다. 유족에게 감사하고 또 감사할 따름이다. 미술관 소장품 1만점 돌파라는 사건도 획기적인데, 그것도 이건희컬렉션으로 소장품 가치를 드높였으니, 이 무슨 행복일까. 그래서 그런지 주위의 지인들은 나를 ‘행복 관장’이라고 부른다. 행복한 관장. 미술관에 즐거운 일이 자꾸 생기고 있기 때문이란다. 그렇다. 정말 미술관에 좋은 일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아니, 그렇게 희망하고 있다)."
3. 미술한류와 RM
윤범모 관장은 "미술한류"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낸 인물이다. 미술계에서 MZ 세대가 자신들의 디지털 모바일 환경에서 새로운 창조정신으로 한류를 선도할 수 있도록 기성세대 화단을 이끌어주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류를 선도적으로 이끈 것은 누가 뭐라해도 방탄소년단이라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방탄소년단의 리더인 RM이 미술광으로, 윤범모 관장과도 인연이 있다. 문학, 미술, 음악 등 다방면에 조예가 깊은 RM의 예술 세계가 세계를 이끈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할 수 있다. 더욱이 한국의 대표격인 젊은 음악인이 한마디를 보태주는 전시는 그야말로 세계인들의 관심을 불러모을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이 세상의 전시가 RM이 본 전시와 보지 않은 전시로 나뉠 정도로 이제 젊은 층을 미술관으로 움직이게 하는 힘이, 세계를 한국 미술로 움직이게 하는 힘은 K-pop과 자연스레 연동되고 있다. 이렇게 한류는 나날히 발전하며, 세계 전시를 통한 미술한류도 하나의 축을 담당하고 있다. RM와 국립현대미술관 윤범모 관장 간의 일화를 "서울경제신문" 인용으로 갈음한다.
“산간벽지의 청소년들도 미술책을 보면서 예술적 감수성을 키웠으면 좋겠다.” 방탄소년단 RM(본명 김남준)의 말이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생일을 맞아 국립현대미술관에 1억 원을 전달했다. 이에 미술관은 이중섭, 김환기, 유영국, 박래현, 이승조 등 도록 8종의 4천 권을 보급할 예정이다. 주로 개인전 중심의 이 도록은 전국 400군데의 도서관이나 학교 등에 무상으로 배포된다. 미술책은 평소 미술관과 거리를 뒀던 젊은 세대에게 미술과 친해질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것이다. 예술적 감수성. 어떤 분야에서 일하든 이는 매우 소중한 자산이 될 것이다. RM은 미술에서 음악적 영감을 얻는다고 했다. 그는 어린 시절 시인 같은 문학도 지망생이었다. 그의 음악은 문학성을 바탕에 깔고 발전했다. 그의 작사 작곡이 방탄소년단의 중심이 돼 세계무대를 누비고 있다. 얼마 전 방탄소년단의 신곡 〈다이너마이트〉가 미국 빌보드 차트 1위에 올라 세계를 놀라게 했다. 코로나 우울시대의 청량수 같은 소식이었다. 어떻게 ‘다이나마이트의 폭발’이 가능할까. 한마디로 예술적 감수성의 승리라고 할 수 있다. 나는 RM을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의 상설전에서 처음 만났다. 누군가는 말했다. 두 가지의 미술전시가 있는데 RM이 본 전시와 그렇지 않은 전시라고. 전시장에서 만난 RM은 나에게 손상기 화가 이야기를 먼저 꺼냈다. 웬 손상기? 나는 놀랐다. 그는 물었다. “관장님이 굴레방다리의 손상기 화실을 찾아 가셨잖아요.” 그렇다. 나는 무명시절의 손상기와 가깝게 지냈고, 그의 작가적 성장과정을 지켜봤다. 〈공작도시〉와 〈시들지 않는 꽃〉 같은 연작은 울림이 큰 작품이었다. 더 이상 시들 것도 없어 더 이상 버림받을 것도 없다는 시든 꽃, 바로 꼽추 화가의 자화상이었다. 개성적 예술세계와 극적인 삶을 살다 요절한 화가 손상기. RM은 손상기를 주목했고 문학적 서정성을 기반으로 한 그의 작품을 공부하며 또 자신의 집에 그의 작품을 걸어놓고 음미하고 있다. RM의 미술에 대한 열정과 해박한 지식은 수준급 이상이다. 그의 탐구욕은 절판된 미술책까지 어렵게 구해 탐독하면서 궁금증을 해결했다. 그래서 수십년 전의 ‘굴레방다리 화실’ 이야기까지 나온 것이다. 그는 미술 에서 받은 영감과 치유의 순간을 다른 청소년들과도 나누고 싶어했다. 자신이 경험한 아름다운 것을 타인에게도 권하고 싶은 소박하고 아름다운 마음에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방탄소년단은 한류의 첨병이면서 우리의 희망이다. 미술한류를 꿈꾸는 우리 미술관 입장으로서 RM의 미술사랑은 커다란 힘이 될 것으로 믿는다. _ [서울경제신문], 2020. 9. 21
4. 한국 미술에 관한 철학
윤범모 관장은 한국을 대표하는 국립현대미술관의 관장이기에 앞서 미술평론가이자 한국미술전문가이다. 그의 한국미술에 대한 애정은 학문적 의미에서 많은 저작들에서 드러나고 있는데, 관장직을 수행하면서 기고한 많은 신문, 인터뷰 등의 글들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한국 미술의 연원과 한국 미술이 어떻게 발전해야 하는가에 대한 평생에 걸친 고민이 결국 국립현대미술관 관장직을 맡으면서 실천에 옮겨져 한국 미술의 위상을 제고하게 된 것이라 말할 수 있다.
한국 미술의 역동성과 확장성은 〈한국미술 1900-2020〉을 펴내면서 드러났다. 해외에 한국미술을 설명할 수 있는 제대로 된 책자가 없는 상황에서 일제강점기의 미술, 전쟁과 이산의 미술, 50-70년대 조국 근대화의 미술, 80년대 저항미술, 90년대 이후 국제화 미술 등으로 분류된 이 책자는 한국미술을 총체적으로 설명하는 도구가 되었고, 한국에서도 해외에서도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윤범모 관장은 80년대 저항 민중 예술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미술 현장에서 축적된 지식과 경험을 망라하여 한국미론을 무애미론으로 정리하며 한국 사회의 복잡성이 어떻게 한국미술의 다양성과 역동성으로 확장되는지 언급하고 있다.
특히 윤범모 관장은 우리 미술에 관한 강한 애착과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그것은 한국 채색화에 대한 재해석이다. 동양화 및 한국화로 알려져 있는 수묵화는 중국미술의 전유물이며, 오방색을 중심으로 한 채색화야말로 우리 미술인데, 이것이 일본의 야나기 무네요시에 의해 민화라고 명명되면서 저평가되고 있었다. 민화라는 명칭의 오류를 바로잡고 우리 미술의 전통을 찾고 전통을 현대화 하는 문제, 즉 법고창신의 정신을 새로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서양미술 범람 시대에 우리 미술의 진면목을 만나고자 많은 세월을 보냈다"고 언급한 바 있다. 그의 "한국미술의 정체성 찾기"는 국립현대미술관의 관장으로 재임하면서 학술적 맥락에서 실천의 단계로 옮겨졌다. 그것은 다분히 성공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