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를 게르스트너의 위대한 유산,『디자이닝 프로그램스』
스위스의 대표 디자이너이자 예술가 카를 게르스트너Karl Gerstner(1930-2017)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타이포그래피, 그래픽 디자인의 역사와 발전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다방면에 걸친 교육을 받고 비판적 사유를 펼친 게르스트너는 1950년대에 운 좋게 현대 미술 혹은 디자인 운동의 선구자인 에밀 루더, 아르민 호프만, 한스 핀슬러, 막스 슈미트, 프리츠 뷔흘러, 마르쿠스 쿠터, 막스 빌, 마르셀 비스, 리하르트 파울 로제, 페레나 뢰벤스베르크 등과 만나며 협업했다.
27세에 쓴 첫 책 『차가운 예술?』을 통해 자신의 관심 분야를 규정하며, 구체미술 대표 작가 4인의 작품 속 수학적, 구축적 개념을 처음으로 심층 분석했다. 예술가로서 체계적인 색채와 형태 언어를 구축한 그의 작업과 세계관은 분석적 사고와 체계적인 이해에 영향을 받아 형성된 것이다. 그는 항상 예술과 과학을 가까이하고자 했다.
1963년 게르스트너는 파울 그레딩거, 마르쿠스 쿠터와 함께 전설적인 광고 에이전시 GGK(Gerstner, Gredinger and Kutter)를 설립해 큰 성공을 거두었다. 세간의 이목을 끄는 홍보 캠페인을 펼치며 미국식 광고 전략에 새로운 디자인 방법론을 철저하게 적용함으로써 스위스에어, 부르다, 랑겐샤이트, IBM 등 여러 기업 아이덴티티를 디자인했다. GGK는 대담하고 도발적인 텍스트를 전경화한 ‘통합적 타이포그래피’를 선보였는데, 이는 특화되어 오늘날의 ‘기업 아이덴티티’나 ‘브랜딩’이라는 분야가 된다.
게르스트너의 가장 중요하고 영향력 있는 작업으로 꼽히는 『디자이닝 프로그램스』는 네 편의 이론적 글을 모은 선집이다. 아루투어 니글리에서 1963년에 독일어 초판이, 1964년에 영문판이 출간되었고, 2007년에 라르스 뮐러 출판사에서 영문 개정증보판이 나왔다. 그는 이 책을 통해 자신의 디자인 개념과 방법론을 전달하는데, 이는 현재의 발전 상황을 볼 때 획기적인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컴퓨터 시대 초기 디자인의 기초를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디자이너가 해당 작업에 대한 모든 심미적 결정을 주관하게 될 혁신적인 법칙이나 시스템을 제안했기 때문이다. 1973년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열린 전시 «designing programs/programming designs»를 기획한 건축가 에밀리오 암바스는 “디자이닝 프로그램스란 배열을 위한 원칙을 창안하는 것”이라고 했다.
‘디자이닝 프로그램스’라는 제목은 그 자체로 하나의 프로그램이다. 각각의 문제에는 다양한 해결책이 존재하며 그중 한 가지를 특정한 상황에 가장 잘 적용할 수 있다. 이 책은 삶에 대한 실천에 관계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다루며, 그래픽, 사진, 음악, 문학, 미술, 타이포그래피에서 나온 많은 사례에서 독자가 소재를 포착하고 발전시켜 작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유도한다. 체계적인 사고, 그리드 구조, 학제간 접근 방식 등은 여러 세대의 디자이너에게 영감을 주었고, 카를 게르스트너의 영향력은 자신의 디자인 프로젝트를 넘어 그래픽 디자인 역사에서 확장되어 지속한다.
현대 그래픽 디자인이 태동하던 시기에 수많은 예술가와 디자이너는 과연 무엇을 추구하고 예견했을까. 그리고 실제 역사는 어떻게 흘러갔는가. 어떤 생각이 실현되었고 어떤 생각이 잊혔는가. 서울시립대학교 최성민 교수는 이와 같은 질문을 던지며 60년 만에 출간된 『디자이닝 프로그램스』 한국어판에서 “60년이라면, 역사적 맥락에서 원작을 이해하고 이를 바탕으로 현재 우리의 현실을 되돌아보는 데 필요한 비판적 거리가 적당히 확보된 시점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라고 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