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스운 이야기 탄생의 공간, 영미!
유배지였으나 차라리 휴가지였던 곳
내ㆍ외직을 두루 거쳤던 이운영은 1780년 충청도 황간(黃澗) 현감으로서 임기가 다해 한양으로 돌아왔다가, 이듬해 바로 다시 황간으로 귀양을 간다. 1781년 시작된 귀양살이는 1782년 해배로 짧게 끝나는데, 그는 이 기간 유배지에 적거(謫居)하면서 『영미편』을 써내려간다. 당시 유배지에서 서적을 집필하는 것은 조선의 사대부들에게 흔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 주제가 해학과 폭소 가득한 야담ㆍ필기집인 것으로 미루어 그는 유배 기간을 차라리 휴가처럼 보내고자 했던 건 아닐까 싶다. 타고난 그의 기질로 보면 가능한 상상이다.
사실 『영미편』은 상징적인 서명(書名)이다. 이운영은 귀양살이 처소가 ‘영수(潁水)의 하류’이기 때문에 이렇게 명명했다고 자신의 문집인 『옥국재유고(玉局齋遺稿)』에 밝혔지만(고사를 보면, ‘영미(潁尾)’는 요(堯) 임금 때 은사(隱士) 허유(許由)가 은거하던 곳인 ‘영수의 하류’를 이르는 말이다), 실제로 그가 유배 생활하던 황간에는 ‘영(潁)’자가 들어간 지명이 없다. 게다가 『영미편』의 마지막 일화가 허유와 관련된 이야기라는 점에서도 ‘영미’라는 서명/공간은 자신의 처지를 은사의 상황에 빗대며 호명된 것임을 추정케 한다.
작정하고 쓴 웃긴 이야기들
웃음으로 조선을 그리다
이운영은 그렇게 무릇 ‘쉬며 일하는(worcation)’ 공간이라 불릴 만한 곳에서 “남을 웃기고 싶다”(『옥국재유고』)는 일념 하에 『영미편』을 엮어낸다. 서사성 강한 “여항의 패사(稗史)”와 작가 자신 및 친인척과 관련된 기록성 일화들인 “예전에 겪은 일”로 구성되어 야담과 필기의 특징을 공히 거느리는 저작임에도, 『영미편』의 야담 성향이 보다 두드러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실제로 일화 곳곳에서 인간사 다양한 감정의 결이 드러나지만, 무엇보다 눈에 들어오는 건 생동감 있게 구현된 해학과 웃음이라는 여유로운 즐김의 현장이다.
후미에 이 책의 발문 격으로 실린 일화에서도 이운영은 “일찍이 『난실만필(蘭室漫筆)』을 보고 좋아하여 그대로 흉내 내보려는 뜻이 있었다”라고 밝힌 바, 『난실만필』은 그의 처남 임매(任邁, 1711~1779)가 쓴 조선 후기 대표적인 야담집 가운데 하나인 『잡기고담(雜記古談)』을 일컫는다. 그가 “세상에 널리 전하는 기이한 이야기들” 가운데 “기록할 만한 것”을 엄선해내는 기준이 과연 무엇이었는지 짚어볼 수 있는 대목이다.
세상은, 인생은 한 판 놀이
그러니 오로지 웃을 뿐!
『영미편』의 일화들을 한번 조감해본다. 우선 총 121편의 일화들을 「과거시험」, 「술」, 「바둑」, 「장기」, 「활쏘기」 등 다섯 개의 소재별 장들(각각 「과장(科場)」, 「주장(酒場)」, 「기장(棋場)」, 「박장(博場)」, 「사장(射場)」 등)로 나누어 묶은 구성이 눈에 들어온다. 여기에 앞선 다섯 장들에 포함되지 않는 다른 소재의 「홑 이야기들」이란 「단설(單說)」 장과 미처 「다하지 못한 이야기들」란 「습유(拾遺)」의 장이 추가된다. 이렇게 장으로 구성된 체재는 이전까지 야담들에서는 볼 수 없던 형태로, 흥미와 재미에 집중하는 작가의 주제의식을 보다 집약적이고 선명하게 전달해준다.
술자리야 당연지사, 바둑이니 장기니 활쏘기 등도 익히 한 판 즐기고 노는 마당을 대표하는 수단들이다. 술 때문에 빚어지는 인간사 포복절도의 에피소드들이야 두말할 것 없고, 맞겨룸이 핵심인 후자의 세 기예 또한 박진감이나 그에 못지않은 허망함을 동력 삼아 전개되는 인생 단막극들을 『영미편』에다 펼쳐놓는다.
무엇보다 이운영은 제법 많은 일화들로, 그것도 책의 첫 장인 「과거시험」 장을 채워놓았는데, 그 이야기들이 전하는 인정세태의 정경은 참으로 가관이다. 남의 것 베껴 쓰는 일이야 다반사, 함께 모여 답안을 쓰거나 대필을 해주고, 백지를 내거나 답안지를 바꿔치며, 시험 전날 시제가 꿈에 나오질 않나, 당락은 글발이 아니라 운발이라 믿질 않나, 청탁과 뒷길에 별별 꼴이 다 보인다. 그래서였을까. 이운영은 이 장의 맨 마지막 일화에서 과거 시험장을 최고의 “놀이판[從政圖, 陞卿圖]”에 빗댔다.
이렇게 과거시험도 바둑장기와 활쏘기도 즐기는 한 판 놀이의 장으로 연결되거니와, 세상도, 인생도 거기서 멀지 않다는 통찰이 저자 이운영의 한 작의였을 듯싶다. 그 놀이들의 궁극이야 웃음에 도달하는 것일 테고.
미워할 수 없는 캐릭터들이 펼치는
해학과 유희의 난장
재미난 캐릭터들이 재미난 이야기를 만든다. 『영미편』도 마찬가지. 예나 지금이나 과음으로 사고치고 별의별 핑계거리를 들이대는 술꾼들과 대국 중인 천하의 고수들이 한 판 인간 희극의 무대 위에서 자기 매력을 발산하는 대표적인 군상들이다. 법회도 싫고 산사도 싫고 대신 기생 끼고 노는 떠들썩한 술자리가 좋다는 금부처나 제 실수를 싸고도는 아첨에 금세 화색이 도는 옥황상제처럼 저세상의 존재들마저 여기선 욕망하는 이 세상 캐릭터들과 다름없다. 옥황상제께 청원하여 하사받은 네 번째 발에 오줌 튈까 두려워 일볼 때마다 다리를 든다 말하는 개처럼 간혹 등장하는 동물 조연들도 터지는 실소를 거드는 캐릭터들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각 일화들 전반에 걸쳐 눈에 밟히는 건 ‘뜻을 이루지 못한 가난한 선비’ 혹은 ‘청렴결백한 선비’라는 뜻을 가진, 일명 ‘조대(措大)’라는 군상들이다. 자신만의 세계에 몰두해 홀로 진지한 이들은 한편으론 남다르고 출중해 보이기도 하건만, 결국은 어리석은 짓이나 저지르고 마는 바보 같은 소인의 캐릭터다. 어쩌면 그렇게들 하나같이 세상의 비웃음을 사는지. 그럼에도 가만히 들여다보면, 이들이 자아내는 웃음이야말로 이른바 “눈물 속의 웃음”으로, 독자들은 이 작은 인간들을 종내 미워할 수는 없을 것이다.
『영미편』의 문학사적 위상
『영미편』 전편을 현대어로 옮기고 꼼꼼하게 주해하고 나서 역자는 18세기 서사문학의 흐름 속에서 새로운 면모를 보여주는 『영미편』의 의의를 세 가지로 정리한다.
첫째, 『영미편』은 대부분 이제껏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이야기들을 담아 한문 서사의 전통을 풍부하게 해준다. 기존 문헌의 것을 옮겨 실은 경우가 많은 18세기 야담집에 비해 『영미편』은 저자 스스로 견문하고 구상한 내용을 서사로 창작한바, 이 시기 야담의 생성과 정립 단계를 여실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특히 견문한 내용에 직접 자신만의 해설을 가미하고 소화와 골계의 요소를 강화한 점은 당대 여타의 야담들과 성격을 달리하는 지점이다.
둘째, 『영미편』은 풍속사, 나아가 문화사 측면에서 주목할 만하다. 당시 생활 전반의 습속과 양태를 눈앞에 보이듯 생생하게 구현해냈다. 비유컨대 몇몇 일화들은 그 묘사를 따라 그대로 그리면 그럴듯한 풍속화가 될 정도다. 특히 과시(科試) 제도와 응시자들 그리고 그 실태를 자연스럽게 일화 속에 녹여 묘사한 「과거시험」 장의 에피소드들은 서사의 세밀함과 생생함이 단연 두드러진다. 『영미편』이 그저 구구한 풍속의 나열에 그치지 않고, 구체적인 설정과 입체적인 인물 묘사를 통해 당대 현실을 실감나게 재현해냈음을 확인해볼 수 있는 대목이다.
셋째, 『영미편』은 옛사람들의 다채롭고 세련된 웃음 코드를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발전된 ‘소화(笑話)’ 서사로서의 가치도 지닌다. 무엇보다 다루는 웃음의 양상이 당대의 야담ㆍ필기들 속 그것과 달라 인상적이다. 조선시대 소화나 골계는 대체로 통속적이고 보편적인 도덕이념을 추구하는 사례가 많았지만, 『영미편』의 웃음은 오로지 즐거움에만 그 목표를 둔 듯하다. 저속한 소화들과는 거리를 둔 채 전아성(典雅性)을 발휘하면서 명랑하고 건강한 기운이 가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