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1720년 문사(文士) 이기지(李器之, 1690∼1722)가 북경으로 출발하여 다시 한양에 돌아오기까지 약 160일 동안 얻은 견문과 체험을 일기 형식으로 기록한 연행록 『일암연기』를 최초로 완역한 것이다. 당시 31세였던 이기지는 진사 시험을 수석으로 통과한 뒤 문과 준비 중에 있었는데, 아버지 이이명이 조선 18대 왕 숙종의 서거를 청나라에 알리기 위해 고부사의 정사로 연행을 떠나자, 자제군관으로서 아버지를 수행하였다. 이기지는 1721년 연행에서 돌아오고 나서, 이듬해에 노론 핵심인물이었던 아버지와 함께 신임사화로 목숨을 잃는다. 『일암연기』는 한 청년이 죽음 직전에 보낸 찬란하고 영광스러운 생의 한때가 기록된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일암연기』는 청나라의 문화예술, 과학기술, 종교는 물론이고, 특히 북경 천주당의 서양 선교사들과 적극적으로 교유하며 얻은 견문이 탁월한 필치로 기록되어 있다. 이기지는 9월 18일부터 11월 24일까지 2개월여를 북경에 머물렀는데, 그때 당시 있었던 동·서·남의 모든 천주당을 아홉 차례 방문하였고, 서양 선교사들의 방문을 받은 것도 세 차례나 되었다. 그들과 편지와 선물은 18회 주고받았는데, 7회는 이기지가, 11회는 선교사들이 보냈다. 이기지는 천문도서, 서양서, 서양화, 와인, 카스테라, 자명종 등을 얻었고, 동서양 역법의 차이, 일식과 월식의 원리, 하늘의 방위 등에 대해 선교사들과 토론했다. 이러한 서양인과의 교류는 현재 확인되는 연행록 가운데 가장 활발한 것이다.
이기지는 여행 중에 조우한 동서양의 문화를 객관적이고 열린 사고로 받아들였다. 이러한 태도는 훗날 북학파 박지원, 박제가, 홍대용 등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박지원은 『열하일기』에서 “이기지는 식견이 탁월하여 후세 사람들로서는 따를 수 없다. 중국을 제대로 보았다. 그림과 천문 관측, 기계에 밝았다”라고 기록하기도 했다.
그동안 조선 후기 3대 연행록으로 알려진 김창업의 『노가재연행일기』(1712년), 홍대용의 『담헌연기』(1766년), 박지원의 『열하일기』(1780년)는 많은 연구가 이루어졌던 데 비해 『일암연기』에 대한 연구는 본격화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러나 『일암연기』는 연행록의 계보에서 『노가재연행일기』를 잇고 수십 년 뒤 쓰인 『담헌연기』, 『열하일기』에 영향을 끼친 중요한 저작이다. 이번 완역본 발간이 앞으로 『일암연기』의 후속 연구와 학계 논의를 활발하게 하는 분수령이 되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