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내가 나일 수 있는 것은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난 기억들을 추억으로 간직할 수 있는 삶을 살고자 한다. 그러나, 기억들이 모두 아름답고, 기쁘고 좋은 것의 군집으로 이루어진 추억일 수만은 없을 것이다. 생의 어느 순간, 어느 지점은 떠올리기조차 숨 막히는 기억으로 존재한다. 해서 그 기억만 없다면 자신의 생은 완벽해질 것만 같은 바람을 갖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완벽한 착각이다.
다섯 편의 대본은 모두 “기억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1. 지우개
시정은 아들을 잃고 죽을 만큼 힘든 시간을 견디고 다시 살 기운을 찾아온 기억을 잃느니 아예 다른 인물로 사는 길을 택합니다. 그만큼 아들을 잃었던 그 시간을 견디어 낸 기억은 소중한 것이었습니다. 시정은 그것을 깨닫게 된 것이지요.
2. 호상
주인공 박판례할머니는 이름도 없이 살다간 우리 사회의 어머니들을 표상합니다. 그들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기억을 되짚어 보는 것으로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결국 우리 어머니들의 헌신적인 과거가 있었기에 우리가 오늘날 이렇게 평안하고 윤택한 삶을 누리고 사는 것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3. 새순
오늘날 우리가 매해, 매 순간 5.18광주민주화운동의 정신을 예술과 문학등으로 재현해야 하는 이유는 그날의 참혹했던 기억이 민주주의란 국민 스스로의 힘으로 지켜 나가야 할 생명임을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5.18 그날의 광주가 오늘날 반드시 회상되어야 하는 또 다른 이유는 민주주의의 불씨가 된 5.18의 참혹했던 기억을 회상함으로써 다음 세대가 역사의 ‘새순’으로 자라날 것임을 기대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4. 갈릴리병원
극 안에 ‘기억하라’는 대사가 사건마다 중요하게 여러 번 반복됩니다. 고난 중에도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기억하라는.
5.수목장
무덤, 장례 등은 실상 살아있는 사람을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나무 아래 죽은 이의 뼛가루를 묻는 행위는 더더욱 그러합니다. 나무와 함께 떠난 이의 기억이 자라나고 다음 세대로 이어지는 것이니까요.
영문학, 교육학, 북한·통일정책학, 신학 등
다양한 학문을 경험한 작가의 폭넓은 세계관
이 책은 총 다섯 편으로 이루어진 시나리오 집으로 각 작품에서는 삶에 있어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고찰하도록 인도한다.
첫 번째 작품인 ‘메피스토펠레스의 유혹, 지우개’에서는 기억을 젊음으로 바꾸는 의학 기술로 젊음에 대한 욕망을 적나라하게 보여 준다.
작중 주인공 ‘시정’에게는 목숨보다 소중한 아들 준호를 잃은 기억이 있다. 아픔을 딛고 무력하나마 현재의 삶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때 젊고 예뻐진 친구를 만나 ‘추억의 성형외과’를 접하게 된다. 그 성형외과에서는 기억을 젊음으로 바꾸는 시술을 하고 있었다.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던 시정은 그 시간을 잊고자 시술을 받았으나 의도와 달리 1년이 아닌 3년의 기억이 지워져 버린다. 3년 전은 아들이 유학을 하고 있던 시기로, 힘든 일을 겪기 전의 기억으로 돌아가 버린 것이다. 기억이 지워진 후에야 아들을 애도하고 이웃들과 봉사활동을 하며 슬픔을 이겨내려 했던 시간들에 대한 소중함을 깨닫는다. 하지만 기억을 돌려받는 길은 없어 결국 젊은 이시정이 되는 길을 택하게 된다.
여기서 작가는 “오늘의 나를 나이게 하는 그것은 바로 기억이기 때문”이라고 하며 지금의 나는 이전의 여러 기억들이 쌓여서 이뤄져 있는 것이라고 한다. ‘나’라고 하는 것의 본질은 힘든 일이든, 좋은 일이든 심지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기억들까지 모두 합치고 쌓여서 이뤄진 것이다. 어떤 좋은 것이 있다 하더라도 ‘나’를 ‘나’로 있게 하는 것은 이전의 기억들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작품은 기억으로 젊음을 산다는 참신한 소재로 극의 재미를 더해 줄 뿐만 아니라 삶의 본질에까지 생각해 보도록 한다.
나머지 네 개의 작품에서도 이상과 현실을 놓고 저울질하며 현실을 선택하기도 하고 이상을 위해 현실을 버리기도 하는 등 다양한 관계를 볼 수 있다. 여러 학문을 공부한 만큼 폭넓은 세계관을 보여 주는 이 책을 통해 삶이 무엇인지 다시 한번 돌아보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