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언제까지 현대미술의 사기를 참아야 하는 걸까?
새로운 20세기 미술사 찾아가기
현대미술에 대한 솔직한 고백
한 번쯤 현대미술 전시회를 가보거나, SNS에서 ‘현대미술 한 방에 정리’, ‘현대미술 최고가 TOP 10’ 같은 영상을 클릭해 본 적 있을지 모른다. 옆 관람객이나 친구에게 잘 보이려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면서, 속으로는 저녁에 뭘 먹을지 고민하지 않았던가? 고명한 비평가들이 극찬하는 예술적 사상의 결정체이자 영혼을 끌어모아도 한참은 모자를 가격에 거래되는 작품을 눈앞에 두고도, 아이들의 낙서라든가 외설물, 장난감을 연상하는 자신을 부끄러워하진 않았은가? 그러면서도 이게 예술 작품으로 인정받는 데는 내가 모르는 이유가 있을 거라고, 나의 모자란 지식과 메마른 감수성, 넷플릭스 결제와 습관적인 유튜브 감상이 문제일 뿐이라고 생각한 적 없는지?
〈또 다른 현대미술〉은 이런 감상이 무척이나 일반적이며, 나아가 전혀 잘못된 게 아니라는 데서 출발한다. 그러니까, 사실 사람들은 현대미술을 좋아하지 않는다. (저자는 단 한 명도 그럴 리 없다고 장담한다!) 그리고 이건 우리에게 현대미술을 이해할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저자에 따르면 진짜 이유는 현대미술에 있다. 고전 예술, 그리고 오늘날 우리가 흔쾌히 즐기는 이른바 대중예술을 보라. 이들은 현실을 하나의 작품으로 재창조함으로써 세계의 숨은 일면과 아름다움을 전달하려 한다. 그러나 현대미술은 반대로 세계와 무관한 개념적이고 형식적인 것(예컨대 커다란 사각형이나 줄무늬), 아름답지 않은 것(소변기, 잘린 성기), 예술과 무관해 보이는 것(통조림, 벽에 붙인 바나나)을 추구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현대미술을 싫어하는 게 더 자연스러운 일 아닐까? 저자는 자신에게 솔직해지자고, 미술계와 미술 시장의 ‘사기’에 더 이상 속지 말자고 이야기한다.
미술의 진보에 대한 신화, 공식적인 미술사
이처럼 〈또 다른 현대미술〉에서 저자가 예술을 바라보는 관점은 (30대란 젊은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무척이나 고전적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모방(재현)을 끌어들이고, 서사나 운율, 찬미, 아름다움이란 전통 미학 개념을 통해 예술적 가치를 판단한다. 동시에 그는 현재 미술계와 미술 시장을 지배하는 담론, 즉 이들이 벌이는 사기의 핵심을 ‘미술의 진보에 대한 신화’ 혹은 ‘20세기 공식적인 미술사’라 부른다. 이에 따르면, 예술이 19세기 말 인상주의부터 20세기 개념미술에 이르는 일련의 과정은 이전 세대의 해체와 전복의 연속이며, 재현이나 아름다움과 같은 고전 개념은 물론 작품이나 예술가란 개념 자체도 모조리 파괴해 나가는 여정이었다. 아방가르드의 물결로 표현되는 이 과정은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역사적 흐름이었고, 인류 사회와 지적 능력의 발전에 발맞춰 예술 역시 새로운 지평선에 도달하는 과정이었다. 이전 세대의 죽음과 폐허로부터 태어난 현대미술(예술)은 예술을 세계로부터, 작품으로부터, 예술 자신으로부터 해방했으며, (비로소) 예술가는 창조주요 연설가, 새로운 영적 지도자로서 한순간 번뜩인 아이디어 혹은 층층이 덮인 해석과 수만 장의 비평으로 무지한 사람들을 일깨우는 이가 되었다.
저자는 이 ‘공식적인 역사’가 오늘날 예술에 대한 불쾌감을 사소하게 만들고, 그에 대한 대중의 거부를 오히려 자기 존재의 정당성으로 삼는다는 점을 지적한다. 대중이 현대미술을 싫어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현대미술은 언제나 과거를 파괴하고 새로운 것을 향해 나아가지만, 사람들은 익숙한 걸 좋아하는 법이니까. 이런 건 예술이 아니란 반발도 마찬가지다. 반 고흐조차 당대에는 외면받았으며, 우리는 그의 명작을 알아보지 못했던 19세기 사람들을 동정한다. 현대미술의 세례를 받지 못한 채 과거에 사로잡혀 인류의 새로운 예술적 도약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이여, 무엇이 진정한 예술인지는 시간이 지나면 역사가 심판할 것이다.
또 다른 현대미술, 진정한 예술가들의 역사
이 지점에서 저자는 묻는다. 19세기를 기점으로 고전 예술은 정말 낡은 것이 되었나? 요컨대 예술이 세계를 재현하고, 예술가가 엉덩이가 닳도록 대상을 관찰하거나 작업장에 처박혀 그림을 연습해야 한다는 건 고리타분하고 시대착오적인 생각일 뿐인가? 현대미술가 제프 쿤스를 싫어하는 것이 반 고흐를 싫어하는 것과 똑같은가? 예술 작품은 역사적 흐름 속에서 온전한 의미와 가치를 획득하는가? 오늘날 모든 예술가는 해방된 존재로서 자유를, 최소한 이전보다 더 누리는가? 예술의 진보는 되돌릴 수 없고 거스를 수 없는 것이었으며, 모든 예술가가 그에 동참했는가?
저자는 작품의 감상과 예술가의 가치는 역사의 흐름 속에서가 아니라 역사의 흐름과 무관하게 나타난단 점을 논의하고(어떤 작품이 나에게 감동적이라면 그것이 인상주의 작품이든 고전 작품이든 무슨 아무 상관인가?), 고전 예술 양식은 마이너 예술을 피난처로 삼았으며 오늘날 이들이 누리는 성공은 바로 그 이유 때문일 것임을 지적한다. 아울러 20세기 미술사의 신화를 이루는 핵심 ‘토템’인 뒤샹, 피카소, 개념미술 등의 의미를 다시 살피고, 이들이 생각만큼 견고하지도, 생각만큼 공식적인 역사를 지지하지도 않음을 이야기한다. 나아가 피카소나 모네처럼 자신들의 이름이 걸린 아방가르드 운동보다 훨씬 오래 예술계에 남아 계속 활동했던 이들, 아방가르드 운동에 참여했다가 다시 고전 예술 양식으로 되돌아온 이들, 어떠한 아방가르드나 역사적 과정에 참여하지 않으면서도 뛰어난 예술 작품을 남긴 이들을 하나씩 지적한다.
이 과정을 통해 저자는 공식적인 미술사가 거짓임을 선언하고, 새로운 20세기 미술사를 제시한다. 이는 세계의 재현과 아름다움의 추구란 예술의 본질을 잊지 않으며 끝없는 노력으로 솜씨를 갈고닦아 고전 작품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여러 작품을 남긴 진정한 예술가들의 역사, 예술의 해방이란 최종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과정이 아니라 인간의 창조적 능력이 변모하며 나타나는 과정으로서의 미술사다. 그가 이 역사를 발견하여 재구성하는 데 있어 핵심 구호는 “진짜는 진짜를 알아본다”로 축약된다. 요컨대 비평가나 역사학자가 아니라, 예술가들 스스로가 찬양하고 수집했던 선대 예술가들, 그리고 그 예술가들의 작품을 다시금 사랑하고 찬미했던 후대 예술가들로 이어지는 긴 사슬을 확인하는 것이다. 이 사슬은 보나르, 뷔야르, 모란디, 호퍼, 발튀스, 피카소와 마티스, 프로이트 등을 포함하며, 자코메티를 기점으로 현대로 이어진다. 물론 과거에도 뛰어난 관찰자와 감식가, 조예 깊은 수집가와 비평가 등 예술가가 아닌 소수의 이들 또한 이 역사를 알고 있었으며, 저자는 이들을 또 다른 현대미술의 증인으로 삼는다.
현대 프랑스의 진정한 예술가들
또 다른 현대미술, 진정한 예술가들의 역사가 사실이라면, 오늘날에도 그런 예술가들이 있지 않을까? 저자는 공식적인 역사의 승리로 인해 오늘날 반 고흐가 살았던 시대보다 훨씬 더 많은 진정한 예술가가, 훨씬 더 오랫동안 외면받고 있음을 이야기하면서, 자코메티 이후 20세기 프랑스에서 활동한 아홉 명의 현대 화가를 소개한다. 이들은 모두 우리 시대를 지배하는 미학과 거리를 두고 (자의든 타의든) 언더그라운드에 머무르면서, 자기 생각과 주장을 외치는 대신 세계를 바라보고 전달하려는 겸손과 끈기를 지녔다. 이들의 작품은 우리에게 거부감을 주거나 예술가의 생각을 강요하지 않으면서도 작품과 세계를 오가는 아름다움을, 내면을 고요히 뒤흔드는 감동을 전달한다. 물론 ‘진짜는 진짜를 알아본다’란 명제에 따라 이들은 서로를 알아보고 찬양했다.
우리는 물론 프랑스인들에게도 생소한 이 예술가들의 이름은 조란 무시치, 레이몬드 메이슨, 자크 트뤼페무스, 아비그도르 아리카, 샘 사프랑, 에릭 데마지에, 장 밥티스트 세슈레, 치아라 가지오티, 드니 몽플뢰르다. 낯선 이름과 작품이 무수히 등장하지만, 크게 걱정하진 않아도 된다. (특히 역서에는 관련 작품을 직접 볼 수 있도록 QR코드를 함께 수록했다.) 저자는 이들의 배경과 작품, 작업 과정, 고전 작품과의 연결 등을 애정 넘치는 관점에서 세세히 전달하며, 기관과 시장에서 외면받는 현실을 토로한다. 또 다른 현대미술의 최근 사슬은 자코메티와 아홉 명의 예술가를 거쳐 1980~1990년대 화가들에게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 저자는 현대미술의 주류 예술가들이 아닌 이들이야말로 20세기의 반 고흐들이며, 현대미술의 사기를 사람들이 깨닫고 자신이 진짜 좋아하는 작품이 무엇인지 솔직히 말할 수 있게 된다면 정당한 명성을 누릴 수 있으리라고 말한다.
프랑스 회화의 전통
새삼스럽지만, 〈또 다른 현대미술〉의 저자 뱅자맹 올리벤느는 프랑스인이다. 마지막 장에서 저자는 조국인 프랑스를 중심으로 새로운 미술사를 탐색하며 발견한, 주류 현대미술에 반하는 프랑스 회화 전통을 설명한다. 그는 이것이 편협한 민족주의와 무관함을 분명히 하면서, 19세기 이후 프랑스의 진정한 예술가들 사이에 마치 메아리처럼 계속해서 울려 퍼지는 어떤 유사성이 존재한다고 이야기한다. 그에 따르면 프랑스의 회화 전통은 푸생과 풍경화와 오달리스크, 대중 무도회와 아이들, 얼굴들, 차분하고 투명한 청색을 특징으로 하며, 관찰된 세계의 기하학적 재구성, 이성과 감성, 색채와 소묘 사이의 균형, 과장되지 않은 고전주의, 이 세계에 대한 평온한 사랑을 사유한다.
저자의 전공이 피부로 느껴지는 이 부분의 설명은 약간 난해하며, 앞의 내용보다 훨씬 더 많이 등장하는 낯선 인물과 작품에 어지러울 수 있겠다. (게다가 프랑스 역사에 대한 약간의 이해도 필요하다) 핵심은, 20세기 미술이 끝없이 해체하고 부정하려는 예술의 ‘전통’이란 후퇴와 고립의 상징이 아니라 새로운 혁신과 확장을 위한 기반이요, 미술사를 마감하는 재료가 될 수 있단 점이다. 그것이 프랑스든, 독일이든, 우리나라든. 물론, 회화의 죽음이 확실해 보이는 이 시대에, 고전 예술 양식과 회화 전통을 따른다는 건 엄청난 용기가 필요한 선택이다. 저자가 앞선 장에서 다룬 위대한 예술가들은 바로 이 선택을 한 사람들이다. 즉 위대한 예술가들은 어떤 전통에 속한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위대한 예술가가 된 것이 아니라, 어떤 전통에 속한 사람이기에, 그것을 계승하고 새로운 것을 발견했기에 위대한 예술가가 될 수 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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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사람들이 예술을 대하는 자세를 결정짓는 것은 작품과 감상자일까, 아니면 그를 둘러싼 비평과 시장 논리일까? 저자는 어떤 작품이 좋은 작품인지 결정하는 것은 이론이나 가격, 비평가, 무엇보다도 역사의 판단일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우리 자신이 감동하고, 매일 즐기고 감상하고 싶은 작품이면 충분하니까. 물론 이 책에서 저자가 내세우는 전통 미학과 미적 기준이 AI마저 동참한 오늘날의 예술에 적절하리란 보장은 없다. 그러나 확실한 건, 지금 미술계가 추앙하는 작품들에 만족하지 못하는 이들이 적지 않으리란 점이다. 〈또 다른 현대미술〉은 그런 이들을 위한 책이다. 제도와 사상, 관습, 시장 논리, 허영심과 유행을 넘어 보다 유연하고 진솔하게 작품을 감상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작은 길잡이가 되어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