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와 자기혐오에서 피어난 꽃
소설가로서의 송기원의 행로, 아니 송기원의 삶 자체가, 자기혐오 없이는 되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온통 치부투성이인, 혹은 ‘치부 그 자체’인 자신의 삶을 ‘아름다움’으로 승화하는 떠돌이 여정이라고 압축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아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승화’가 아니다. 치부가 아름다움으로 승화한 것이 아니라, 치부 자체가 아름다움이 되어버리는 그 연금술! 송기원이라는 인간의 삶 자체가 마치 보들레르의 ‘악의 꽃’의 화신처럼 여겨지는 것은 그 때문이다. 악의 꽃은 악이 승화되어 피어난 꽃이 아니다. 그 꽃은 악을 자양분으로 해서 피어난 꽃이다. 그 꽃은 악이라는 조건이 없으면 피어날 수 없는 꽃이다. 그 꽃은 악 자체가 꽃이 피어나는 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절대 조건이 된 상태에서 피어난 꽃이다. 마찬가지로 송기원의 삶을 온통 지배하고 있는 상처와 치부는 그 자체 아름다움을 가능하게 하는 절대 조건이다. 그리고 상처가 깊을수록 꽃도 아름다운 법이다. 그 연금술 과정에서 송기원이 만난 것이 바로 문학이다. 그리고 송기원과 문학의 그 만남은 운명적이다. 그 만남이 운명적이라는 것은, 그 만남이 그만큼 우연적이었음을, 그만큼 충격적이었음을 뜻한다.
부정적 자의식이
당당하게 세상에 끼어든 문학이 되기까지
자기 혐오 없이는 돌아볼 수 없는 자신의 삶, 치부투성이인 자신의 삶이 당당하게 세상에 끼어들 수 있는 방책! 그것이 바로 문학이었다. 자신의 삶을 아름답게 각색할 수 있는 방책으로서의 문학이 아니라, 자기혐오에 빠질 수밖에 없게 만드는 자신의 삶을 아슬아슬하게, 그러나 당당하게 보여줄 수 있는 방책으로서의 문학! 그렇다면 문학이 한동안 송기원에게 상처 자체를 아름다움으로 만드는 연금술의 용광로 구실을 한 셈이다. 그에게 문학은 그가 상처투성이 삶으로부터 도망할 수 있는 도피처나 은신처가 아니었다. 그에게 문학은 상처를 그대로 안고, 그 상처와 피투성이가 되어 함께 뒹구는, 치열한 도가니였다.
나는 눈물을 흘리고 흘리고 또 흘렸다. 그렇게 눈물을 흘리면서 나는 만산홍이 연분홍 눈물로 아롱진 시야 가득히 무슨 파노라마처럼 박말순이 한평생이 펼쳐지는 것을 보았다…….
(……) 그렇게 소리꾼으로도 인생으로도 실패한 걸레보다 더 지저분한 그녀가 펼쳐지고 있었다. 그렇게 돈도 싫고 남자도 싫고 명예도 싫어서 결국 염세병이 걸린 그녀가 펼쳐지고 있었다.
(『별밭공원』(실천문학사), 80~81쪽)
감히 말하지만, 그 경지는 대단한 경지이다. 직접 내면으로 체험하지 못하면 흉내조차 낼 수 없는 경지이다. 송기원의 기구한 팔자도, 그가 맞이한 시대적 환경도, 그의 퇴폐 기질도, 느닷없이 그에게 찾아온 문학과의 만남도 그를 망가뜨리지 못했기에 그는 그 경지에 오른 것이다. 아니다. 실은 그 모든 것에 의해 송기원은 철저히 망가졌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망가져 가고 있다. 망가짐으로써 망가지지 않는 삶, 그것이 ‘장돌뱅이’ 송기원의 삶이다. 모든 것을 버리고 철저히 망가지니까 삶의 진정한 모습이 보인다는 그런 뻔한 이야기를 하자는 게 아니다. 그런 뻔한 결론은 그가 결코 몸에 걸칠 수 없는, 그의 몸에 맞지 않는 옷 같은 것이다. 그 어떤 옷도 몸에 맞지 않아 계속 벗어버리는 삶, 그것이 송기원식의 망가지는 삶이다.
이제 송기원은 자기 옷을 찾아 입었을까? 아마, 그런 것 같다. 실은 다 벗어버리는 데 성공했는지도 모른다. 그가 해골 그림만 그리게 되는 것은 그때문인지 모른다. 그는 몇몇 해골 옆에 예쁜 꽃을 함께 그렸다고 했다. 그 꽃은 해골에서 피어난 꽃일까? 아니면 해골에게 바치는 꽃일까? 하긴 그 어떤 꽃이건 무슨 상관이 있으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