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이년아. 너는 참 좋겠다
딸의 결혼과 엄마의 자리
오랜 시간 욕망의 주체나 대상이 되지 못했던 기연에게 딸의 결혼은 어머니로서 가졌던 애착의 자리마저 이제 소멸했음을 알린다. 그렇게 딸아이가 떠난 뒤 자신이 인생의 변두리 즈음에 놓였다 생각했던 기연에게 치수와의 사랑은 어떤 삶을 다시 살아가게끔 자리를 내어준다. 사랑은 그녀를 생의 주인공으로 부른다. _강도희(문학평론가)
기연은 공무원이 된 어린 딸이 결혼을 선택하는 것이 못마땅하다. 남편과 사랑을 주고받아본 적 없는 그녀는 늘 자신을 비난하기만 하는 남편과의 결혼생활에 깊은 피로감을 느끼고, 딸은 자신과 다른 삶을 살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기연은 딸의 혼수를 준비하기 위해 자기 딸의 이름과 똑같은 ‘재연이불집’에 들어서고, 그곳에서 만난 이불집 사장 박치수에게 이끌린다. 살면서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던 감정에 혼란을 느끼던 그녀는 이불가게 주변을 배회하다 어지럼증으로 근처 의자에 앉아 잠시 의식을 놓게 되는데, 그 모습을 치수가 발견한다. 이날을 계기로 두 사람은 마음을 나누게 되지만 기연은 자신이 오랫동안 지켜왔던 무언가가 치수와의 만남 이후 흔들리고 있다는 불안감을 느낀다.
▶ 왜 인간은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가장 잔인한 걸까
사랑의 성공이 결혼으로 끝나기에는 숱하게 많은 위기와 좌절이 그 후에 찾아온다. 가족 내부에서 모순과 소외감을 경험한 여자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자신들이 얼마나 실패했는지 가늠한다. 그렇다고 서로를 동경하고 다른 길을 택하기에는 타인의 실패가 갖는 무게도 만만치 않다. _강도희(문학평론가)
『기연』에는 기연뿐 아니라 가족 속에서 자신의 희미한 존재를 느끼는 다양한 여성 인물들의 시점이 드러나 있다. 이혼하고 화가로서 홀로 삶을 살아가는 기연의 친구 주선, 오랫동안 혼자서만 가족의 의무를 이행하고 가족을 지탱해온 치수의 아내 미옥, 집을 떠났다 다시 돌아온 엄마를 보면서도 여전히 결핍을 느끼는 한성의 딸 예리 등 이들은 모두 가족의 부재를 느낀다. 가족이 있음에도 느끼는 부재의 감각은 해당 인물의 자아를 더 옅어지게 만든다. 남편, 자식, 엄마와의 관계 속에서 느끼는 소외감과 상처를 오래 곱씹어 나타나는 것은 텅 빈 결락감이다.
▶ 내 딸이 이 세상에 살아 있는 한
그는 죽음을 생각하고 있을까. 갑자기 딸아이의 얼굴이 떠올랐다. 기연은 자신과 세상을 이어주는 유일한 끈이 딸이라는 사실에 안도했다. 딸이 있기에 그녀는 세상 쪽으로 바짝 붙어 걸을 수 있었다. 둥근 볼과 부드러운 이마를 지닌 아기였던 내 딸. 내 딸이 이 세상에 살아 있는 한 그녀는 이 세상을 떠나고 싶지 않았다. _p.179~180
비록 자식과 가족이 자신의 존재를 희미하게 만들고 마음속의 허무를 생성하게 한다 할지라도 기연은 가족을 떠나지 않는다. 딸, 자식은 절대 나와 동일한 인간이 아니다. 하지만 딸 재연은 기연의 일부이자 기연에게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삶을 택하게 하는 이유이다. 딸이 보기에는 미련하고 무기력하게 느껴질지 몰라도 그녀는 딸에 대한 사랑으로 그 자리를 지킨다. 다른 곳으로 가지 못해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 자리에 생명이라는 빛이 있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