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 내용
인간이 만든 기계, 즉 로봇이 인간을 지배하게 된 미래세계. 인류는 20세기 후반 지속해서 핵전쟁 위협에 시달렸고, 인간의 변덕에 행성 전체의 운명을 맡겨둘 수 없다고 판단한 로봇은 안전장치를 가동해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가 안전하게 공존하고 상생하는 체계를 구축한다. 그 결과, 세상은 멈추었다. 로봇은 감시카메라와 자율주행 교통수단, 무인정찰 비행기기와 스마트 건축물 시스템을 작동해 곳곳을 감시하고, 기계의 노예로 전락한 인간은 로봇 편에 서지 않은 다른 인간을 포획해 로봇에게 넘긴다. 차량 전복 사고로 죽기 일보 직전에 흡혈인의 도움으로 목숨을 구한 ‘나’는 한쪽 다리를 잃은 채 흡혈인으로 다시 태어난다. 인간에서 흡혈인으로 변하면서 새로운 가치관과 공격성을 얻은 ‘나’는 인류 문명의 종말을 원치 않는 인간들과 함께 로봇, 그리고 로봇에 포섭된 기계숭배자들에 맞서 싸운다. ‘나’와 동료들은 우연히 발견한 인간형 로봇 빌리가 자신은 ‘인간’이라고 주장하는 데 의아해하며 끊임없이 빌리를 의심하나 그는 어찌 된 일인지 ‘나’와 한편이 되어 싸운다. 급기야 빌리는 자신과 같은 인조인간을 만들어내는 제작소가 어디인지 알고 있다며 그곳을 파괴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추천의 글
절망의 시대다. 파멸과 절망만이 남은 시대에서 인간을 죽이는 것에 능숙한 인간은 서로 몸을 부대끼며 가장 아래에서부터 천천히 누군가를 죽여가는 시대다. 가장 아래에서 죽음을 선택할 수 없는 존재들이 있다. 죽음을 선택할 수 있는 것. 어떤 최악의 경우이더라도 모든 생명이 의지대로 죽을 권리가 있는 것. 약육강식의 절대적 법칙이 깔린 세계에서, 기어코 자신이기를 선택해 밤을 걷는 존재들이 있다. 그리고 그 반대편에 적자생존을 외치며 쉽게 기계를 따르는, 우스운 인간들이 있다. 그 우스움은 무엇으로 파멸할 것인가, 어떻게 죽을 것인가에 대한 질문에서 우리를 꽤 신념 있는 ‘인간’이 되고 싶게끔 한다. 세뇌당하지 않아 흡혈인이 되거나 살해당하더라도.
- 천선란 「발문」 중에서
‘나’는 인간이 아니기에 눈물을 흘리는 대신 기억한다. 그리고 피를 흘리는 대신 적을 사냥한다. 다시금 공포의 존재가 되어 미지의 힘을 발휘하고자 한다. ‘나’의 싸움은 절망적이지만, 스스로 선택하는 죽음은 ‘나’가 목표할 만한 것이다. (……) ‘빌리’는 ‘인조인간’인데도 인간이나 흡혈인처럼 ‘나’의 눈앞에서 죽음을 선택한다. 그는 인간을 이어받은 기계가 시도한 모든 모방품 중에서 최고의 인간성을 보인다. (……) 인간과 비인간, 합리와 비합리가 밤의 어둠 속에서 뒤섞이는 가운데, 「밤」은 공포와 안도의 양면을 말한다.
- 심완선 「작품해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