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권〉 KARMA LAW - 인생의 절대 법칙
최준식 교수의 종교와 인간 운명에 대한 ‘마지막 깨달음’
카르마 법칙은 우리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법칙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의 모든 것을 관장하는 법칙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살면서 수없이 많은 사건을 겪게 된다. 예를 들어 일정한 부모 밑에서 태어나고 특정한 배우자와 자식을 두고 산다. 그런데 카르마 법칙을 공부해보면 이 모든 것이 카르마 법칙에 따라 생겨난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 많은 일이 흡사 우연으로 일어난 것 같지만 카르마 법칙에 따라 필연적으로 생겨났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우리가 이전 생에 만들었던 카르마를 해소하기 위해 이런 일들이 생겨난 것이다. 이 카르마 해소는 우리가 도덕적인 완성을 이루기 위해서 필수적인 것이기 때문에 매우 중요한 일이다.
카르마 법칙은 우리의 모든 생, 그러니까 전생과 현생, 그리고 내생 모두를 관장하는 인생의 절대 법칙이다. 이 법칙을 제대로 알아야 진정으로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 이 책을 읽으면
독자들은 이번 생의 내 카르마는 무엇이고 이것을 해소하기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알게 될 것이다.
〈2권〉 META RELIGION - 인간의 궁극적인 문제에 대한 분석과 해결
최준식 교수에게 듣는 지금껏 세상에 없던 종교 이야기
종교는 인간의 궁극적인 문제를 분석하고 그 해결책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인간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인간은 이 문제를 해결해야 인간으로 태어난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데 철학이나 문학 같은 분야에서는 이 일을 전체적으로 다루지 못한다.
이 책에서는 종교의 이러한 면을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그뿐만 아니라 모든 것의 근원이라 할 수 있는 절대 실재, 즉 신이나 브라만, 우주 의식, 일심 등으로 일컬어지는 실재(Reality)에 대해 더 이상 쉬울 수 없는 언어로 친절하게 설명하고 있다. 같은 주제를 이 책보다 더 쉬우면서도 심도 있게 다룬 책은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아울러 이 절대 실재에 도달할 수 있는 길을 ‘지혜의 길’, ‘헌신의 길’, ‘행위의 길’ 등 셋으로 나누어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는 것도 이 책의 특장점이라 하겠다.
이 책을 읽고 나면 독자들은 인류에게 종교가 왜 필수 불가결한 것인지 확실하게 알 수 있게 되고, 그 결과 자신이 지닌 삶의 지평선이 확연하게 넓어지는 것을 느끼게 될 것이다.
〈3권〉 STOP THINKING - 현대의 붓다, 유지 크리슈나무르티에 대한 모든 것
최준식 교수가 본 현대의 붓다 U.G. Krishnamurti
가히 현대의 붓다라 할 수 있는 유지 크리슈나무티는 근현대에 존재했던 성자 가운데 가장 강렬한 깨달음을 체험한 사람일 것이다. 그러나 그는 깨달음을 포함해서 모든 것을 부정했고 부정하는 자신의 말까지도 부정해버렸다. 그런 점에서 그는 대승불교의 중심 철학인 중론(中論)에서 모든 것을 부정한 용수를 연상하게 한다.
유지를 읽는다는 것은 ‘영적 테러리스트’에게 노출되는 일이다. 그는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신념들, 즉 신이나 자아, 깨달음, 환생, 사랑 등에 관한 생각을 모두 뒤엎어버렸다. 그는 깨달음에 도달하는 어떤 방법도 제시하지 않았고 제자들로 조직을 만들지도 않았으며 사무실도 없었고 비서도 없었다. 그러니 전화나 팩스도 있을 수 없었고 고정된 주소도 없었다. 그저 친구들과 같이 다니거나 작은 아파트를 빌려 기거할 뿐이었다.
이런 유지를 정의 내리는 일은 매우 힘들지만 가장 확실한 것은 그는 구도(求道)의 끝이라는 것이다. 이 책은 그런 불세출의 성자를 샅샅이 다루고 있는데 삶과 종교에 대해 진정으로 관심 있는 독자는 이 책을 통해 이전과는 격이 다른 새로운 체험을 하게 될 것이다.
저자가 이 책에서 정리한 종교에 대한 정의는 “인간의 궁극적 문제에 대한 분석과 해결책을 제시하는 삶의 분야”라는 것이다. 저자에게 종교라는 것은 이 문제를 어떻게 푸느냐에 관계된 것이지 기독교적인 신학이나 불교의 난해한 교학을 어렵게 공부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 문제에 대해 말할 때 저자가 항상 인용하는 사람이 있다. 20세기 기독교 신학계의 거성이었던 폴 틸리히(1886~1965)인데 그는 신앙(faith)을 다음과 같이 절묘하게 정의한 적이 있다. ‘신앙이란 어떤 것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궁극적인 관심에 사로잡힌 상태’라는 것이다. 이런 식의 문구는 기독교 전통에서는 나오기 힘든 정의인데 그는 이 같은 참신한 주장을 해서 주목을 받았다. 종교는 바로 이 같은 궁극적 관심을 다룬다. 가령 ‘나는 누구인가? 나는 왜 사는가? 내 삶은 의미가 있는 것인가? 나는 어떻게 살아야 가장 옳은 것인가’와 같은 가장 기본적인 관심에 대해 질문하는 것이다.
더 살가운 예를 들어보면, 한국 근대의 위대한 선승이었던 경허(1849~1912)는 원래 화엄경을 주로 강의하던 학승이었다. 그러던 그가 전염병으로 사람들이 죽어가는 마을을 방문했다가 큰 충격을 받는다. 그리곤 자신이 가르치던 경전은 죽음 앞에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참선 같은 수행만이 자신에게 답을 줄 수 있다는 강한 확신에 휩싸인다. 그 뒤 그는 모든 경전과 결별하고 엄청나게 강도 높은 참선 수행에 돌입한다. 그리고 그는 나름의 깨달음을 얻게 되는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가 인간의 죽음을 목도하고 궁극적 관심에 빠졌다는 것이다. 그는 죽음 앞에서 삶의 모든 것이 의미가 없어지는 것을 알아차리고 ‘도대체 나는 왜 사는 것인가?’와 같은 궁극적 관심에 눈뜬 것이다.
이 같은 궁극적 관심은 한번 갖게 되면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것이 아니라 우리는 그 질문에서 빠져나오지 못한다. 아무리 다른 일을 하고 있어도 마음의 저류에는 이 관심이 도사리고 있다. 그리고 이 문제를 풀지 않는 한 삶은 별 의미가 없다는 것도 알고 있다. 이 사정은 같은 일을 당해본 사람은 곧 알아채고 동감할 것이다. 내가 이에 대해 다소 길게 이야기하는 까닭은 종교 공부를 잠시 떠나 한국 문화 연구에 몰두할 때도 종교에 대한 생각은 한번도 저버린 적이 없다는 것을 말하기 위함이다.